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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의 책

황병승 시집 <육체쇼와 전집>

 <시사IN>에서 다음 책을 2013년 상반기의 인문서로 선정했다.

 

- 시  황병승<육체쇼와 전집>, 문학과지성사

- 소설  정지아 <숲의 대화>, 은행나무

- 인문,사회  한윤형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어크로스 

                강신주, 지승호 <강신주의 맨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 시대의 창

- 역사  고경태 <대한국민 현대사>, 푸른숲

          미야지마 히로시 <미야지마 히로시, 나의 한국사 공부>, 너머북스

 

* 추천위원

고영직(문학평론가) 권혁웅(문학평론가) 금정연(서평가) 김수한(현암사 주간) 김정희(예스24콘텐츠미디어팀장) 김형보(어크로스 대표) 김홍민(북스피어 대표) 박태근(알라딘 인문사회MD) 변정수(출판컨설턴트) 이광호(문학평론가) 이현우(로쟈, 서평가) 장동석(출판평론가) 전성원(<황해문화> 편집장) 정여울(문학평론가) 함돈균(문학평론가)

 

 

 

괴물을 들여다 보는 카프카

- 황병승 <육체쇼와 전집>

 

 

 

 

 

평단의 것이든, 대중의 것이든 세간의 상당한 관심사를 받으면서도 이른바 ‘제도권’이라고 불리는 성격의 것으로는 쉽게 편입될 수 없는 종류의 에너지를 보유한 작가들이 있다. 예컨대 1930년대의 이상과 같은 작가가 그렇다. 우리는 그걸 어떤 의미로든 ‘전위’라고 부른다. 출간과 더불어 예사롭지 않은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황병승의 세 번째 시집 <육체쇼와 전집>도 그런 종류의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황병승은 여러 모로 주목할 점이 적지 않은 시인이다. 하지만 이번 시집과 관련하여 얘기한다면 아무래도 이 시집이 자아내는 참혹함과 기이한 비애의 정서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비애의 정서를 드러내는 시인들은 흔하지만, 1980년대의 최승자가 그러했던 것처럼 제 살을 스스로 후벼 파는 생채기들만으로 그 정서를 드러낼 수 있는 시인은 극히 드물다. 붓다는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는가 라는 화두를 남기기도 했지만, 황병승이 이 생채기의 언어를 통해서 들여다 보는 것은 오히려 내 안의 ‘괴물’이다.

 

내 안의 괴물을 스스로 고발하는 이 피학적 언어들은, 율법학자들의 죽은 도덕주의의 채찍과 호기심 어린 대중의 조롱에 둘러싸여 예수가 골고다의 십자가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것과 비슷한 숙명을 타고 났다. 그래서 수많은 우화들로 제시된 이 ‘전집’을 오해하지 않기 위해서는 다소의 ‘주의’가 요구된다. 예컨대 이 시집의 처음을 여는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녀는 위대한 배우였지만 사랑에 번번이 실패하는 불행한 여자에 불과했다”(「벌거벗은 포도송이」). “누구도 손가락질 할 수 없을 만큼 나는 재능 있고 병들고 고단한 사내입니다”(「톱 연주를 듣는 밤」)라는 표현도 있다. 이 말의 속내를 번역하면 이렇다. ‘탁월한 시적 능력을 소유한 시인은 일상적 삶에서는 늘 실패한다’. 그러므로 ‘재능 있는 나’는 “병들고 고단한 사내”다.

 

어떤 독자는 ‘웬 왕자병?’이라며 반문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시인이 지금 말하는 ‘위대함’ ‘재능’은 시를 ‘만드는 손목 힘’ 같은 걸 뜻하는 게 아니다. 황병승에게 이 말은 ‘시적 순결성’의 다른 표현이다. 이 표현은 그러므로 토마스만이 「토니오 크뢰거」에서 보여주었던 ‘건실한 은행가는 예술가가 될 수 없으며, 생활하는 자는 결코 창조하지 못한다’는 작가적 고뇌와 다른 게 아니다. 황병승이 스스로를 “카프카”’라고 지칭할 때, 그건 늘 “경찰에 쫒기는 몸”으로 “안개와 어둠뿐인 성 주변을 맴돌며 오늘도 심판을 기다리는”(「톱 연주를 듣는 밤」) 순결한 시인의 운명에 순종하겠다는 자기다짐임을 알아야 한다.

 

황병승을 ‘완전소중 시코쿠’라고 부른 경의를 표할 만한 평론가 황현산이, 이 시집 해설에서는 그를 ‘실패한 성자(聖者)’라고 불렀다.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지만 난 그래서 오히려 그를 거꾸로 부르고 싶다.

 

이 시집의 화자는 매일매일 심판을 기다리는 ‘속죄의 괴물’이다.

 

가짜 시인의 거울에는 늘 성자가 나타나지만, 진짜 시인의 거울에는 자주 괴물이 나타난다.

 

 

* 함돈균 (문학평론가, <시민행성> 운영위원) / <시사IN> 301호, 2013.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