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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의 책

지그문트 바우만 <방황하는 개인들의 사회>

 

 

 * 최근 서점의 신간 인문서적 가판대에는 '연애-섹스'를 가르치는 책들이 가득 쌓여 있습니다. 대학에서는 '연애술' 강의가 인기라고도 합니다. 교양상품과 고급정보가 쏟아지고, 탄탄한 스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조차 그런 걸 누군가 '가르쳐주어야' 할 수 있는 시대가 지금인가 봅니다.

우리 시대의 지적 그루 중 하나로 불리는 지그문트 바우만이 '사랑-성'의 문제를 비롯하여 이 시대의 인간관계에 대해 성찰한 사색들을 담았습니다 

 

우리의 존재 방식 The Way We are
1. 노동의 흥망성쇠
2. 지역적 질서, 세계적 혼돈
3. 자유와 안정: 그 파란만장한 인연,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4. 근대와 명료성: 실패한 사랑 이야기
5. 내 동생이 내 책임입니까?
6. 다름으로 하나 되기

우리의 사고 방식 The Way We Think
7. 비평-사유화 그리고 무장해제
8. 진보: 같고 또 다름
9. 빈곤의 쓰임새
10. 교육: 실시되고 있는, 걸맞은, 그래도 해야 하는
11. 세계화하는 세계에서의 정체성
12. 믿음과 즉각적인 보상

우리의 행동 방식 The Way We Act
13. 사랑은 이성이 필요할까?
14. 개인의 도덕성, 부도덕한 세계
15. 두 개의 전투를 치르는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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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현대성과 홀로코스트>,<방황하는 개인들의 사회>,<리퀴드 러브> … 총 110종 (모두보기)
소개 :
근대성에 대한 오랜 천착으로 잘 알려진 폴란드 출신 사회학자다. 1925년 폴란드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를 피해 소련으로 도피했다가 소련군이 지휘하는 폴란드 의용군에 가담해 바르샤바로 귀환했다. 폴란드사회과학원에서 사회학을 공부했고, 후에 바르샤바대학교에 진학해 철학을 공부했다. 1954년에 바르샤바대학교의 교수가 되었고 철학자 레셰크 코와코프스키 등과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 활동했다. 1968년 공산당이 주도한 반유대 캠페인의 절정기에 교수직을 잃고 국적을 박탈당한 채 조국을 떠났다. 이스라엘로 건너갔지...

불멸과 영원은 사라지고, 일시적인 단편들이
끊임없이 흩어져 이동하는 최초의 시대, 개인들의 사회


<우리>는 모두 개인이다.
<나>는 홀로 불확실한 미래, 불시에 다가올 재앙 앞에 서있다.
직장, 자본, 세계, 정체성, 믿음 등 모든 것이
일시적인, 유동적인 관계만을 원한다.
사회는 더 이상 개인의 불운을 집단적으로 해결해주지 않는다.
해결해주겠다는 약속조차 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무엇이 우리를 떠돌게 하는가?

지금 우리는 <개인들의 사회>라는 최초의 시대를 살고 있다. <개인들의 사회>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가 맺는 관계가 일시적, 한시적인 계약 관계이다. 그리고 인간은 ‘우리’라는 공동체에서 벗어나 홀로 떠돌고 방황하는 유목민적 운명에 처한다. 공공의 문제를 공공의 장에서 이야기하는 일은 무의미해지고, 공적 책임과 윤리 역시 개인적이고도 사적인 문제로 전락하고 만다. 우리는 공적인 인간, 공적 사회, 공적 책임이 부재하는 <개인화 사회>를 살고 있다. 이 책 『방황하는 개인들의 사회 The Individualized Society』는 개인화 사회를 사는 우리의 사고방식, 존재방식, 행동방식 관한 바우만의 성찰이다.

1.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
- 노동, 세계화, 자유와 안정, 모호함, 다양성과 배타성


출렁이듯 움직이고 빠르게 변하는 ‘유동하는 근대’에서는 우리의 사는 방식과 행동, 정치·사회 구조, 사회문제도 함께 흔들린다. 바우만이 지적하는 첫 번째 문제는 노동문제다.
둘 간의 상호의존으로 자본과 노동의 결합이 강했던 ‘무거운 근대’를 지나 노동의 존재 양상은 달라졌다. 변화의 핵심은 ‘장기간’ 개념이 ‘단기간’의 개념으로 대체된 점이다. 노동이 단기 고용으로 바뀌고 미래에 대한 전망은 보장되기는커녕 확정적이지도 않고 단편적인 특성을 지닌다. 승진과 해고와 관련된 원칙들이 파기되거나 바뀌었다. 따라서 서로에 대한 충성심이나 헌신이 싹틀 기회가 없다. 포드식 평생 고용 같은 장기간 의존이 가능하지 않으므로 공존재(함께함/Togetherness)할 방법에 대한 지혜를 모으기 위한 비판은커녕 관심조차 갖지 않는다. 오늘날 ‘액체화’된, ‘유동적인’ 사회에 적합한 노동력은 분산된, 흩어진, 탈규제적인 ‘유연한 노동시장’의 형태이다. 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자본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지 조직적인 저항을 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고분고분한 노동력을 말한다.
이러한 노동의 유연성 문제는 ‘세계화’라는 새로운 흐름, 권력이 자본 중심으로 재편성되는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바우만은 ‘세계화’라고 명명된 ‘새로운 세계 무질서’에서 질서의 가치절하가 일어난다고 말한다. ‘세계화’된 세상에서 질서는 무력함과 종속의 지표가 되고, 새로운 세계 권력 구조는 이동성과 정착성, 우발성과 반복성, 제약의 희소성 등으로 유지된다. 지역사회에 대해 어떤 약속도 하지 않거나 약속을 쉽게 파기할 수 있는 능력을 통해 얻은 이동의 자유는 오늘날 지역적 차원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차원에서 사람들을 계층화하는 주요 요인이다.
피에르 자네는 근대 개인에게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질병은 ‘자아의 부족’에서 기인한다고 보았다. 그의 진단은 바우만이 진단하는 포스트모더니티의 병명과 닿아있다. 오늘날 인간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자신들이 도달할 수 없는 이상적인 수준을 사회가 강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이상의 부재(不在)’이다. 여기서 오는 무력함과 무기력이 이 시대가 앓는 병명이다.
울리히 벡의 주장처럼, 우리가 사는 이 ‘위험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지배력을 확장하고 있는 ‘모호함’은 나름대로 쓸모가 있다. 모호함은 현대를 발전시키는 과학과 기술이라는 두 바퀴가 잘 굴러가도록 만드는 윤활제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인류의 진보를 가져오기도 한다. 그러나 모호함이 야기한 결과를 감당하는 것은 개인의 몫이다.
우리는 대부분 우리의 자유를 자유롭게 누릴 수 있지만, 자유를 누리는 데서 오는 결과는 마음대로 피할 수 없다. 자유가 야기하는 결과를 타개해나가려면 모호함을 만들어내는 시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시장은 모호함의 생명을 유지해주고 모호함은 시장의 생명을 유지해준다. 이 폐쇄적인 순환구조에 빠져나올 탈출구는 보이지 않지만, 순환구조를 개혁할 공동의 노력이 필요하다.
바우만은 복지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말한다. 과연 복지가 필요한가? 이제 복지는 폐기되거나 축소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근대 초창기에 복지 국가의 출현은 자연스럽고도 필연적이었다. 복지란 빈곤층과 장애인들, 나태한 사람들을 언제라도 다시 산업역군이나 군인에 편입될 수 있도록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노동의 유연성’과 ‘미래의 불확실성’을 고민할 수밖에 없는 지금, 상황은 달라졌다. 전통적으로 ‘실직자’라고 불렸던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노동예비군’이 아니다. 사회에서 빈곤층은 소비자로서도 무용지물이다. 그들은 계급 밖의 계급, ‘사회체제’로부터 영구히 단절된 부류이자, 빈곤층, 하층민이다. 따라서 이들과 연대감을 느끼지 못하며 이들이 처한 곤궁한 처지에 자신들의 모습을 투영하지 않는다.
바우만은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말을 인용해 복지의 윤리적 타당성을 옹호한다. 레비나스는 “내 동생이 내 책임입니까, 내가 알게 뭡니까?”라는 카인의 의문형 대답으로부터 모든 부도덕함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당연히 내 형제는 내 책임이다. 인간적이고 문명화된 사회에 복지국가가 존재해야 한다는 주장을 정당화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윤리적인 이유뿐이다.

현재 사회에서 우리 삶은 불확실성, 예측 불가능성, 불안정성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이러한 특징들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바우만은 첫 번째로 근대 사회의 특징이었던 질서화, 구조화가 사라지고 있다는 현상을 든다. 이는 사물에 질서를 부여하고 그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방법과 기술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다음으로 보편적인 탈규제현상을 든다. 비합리적이고 도덕적으로 맹목적인 시장경쟁에는 경제적인 면 외에는 아무것도 고려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이다. 끝으로 이미지 산업을 통해 끊임없이 전달받는 메시지를 이야기한다. 세계는 본질적으로 불확정적이고 유동적이라는 메시지이다. 이러한 것들이 현대 사회의 불확실성의 측면들이며, 이는 불안감을 초래한다. 이러한 불안감은 새로운 개인의 자유, 새로운 개인의 책임을 얻은 대신 치러야 하는 대가이다.
이러한 불안감과 두려움을 해결할 공동의 노력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의 개인들은 이 두려움과 불안감을 ‘새로운 이방인들’에게 집중한다. 국수주의와 인종차별주의를 연구하는 필 코헨(Phil Cohen)의 주장을 따르면, 민족적이든 인종적이든 모든 외국인 혐오증, 이방인을 적으로 간주하고 개인이나 집단의 주권을 제한하고 경계를 만드는 모든 행위는 그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는 은유적 표현으로서 안전한 집이라는 이상적인 개념을 표방한다. 이방인에 대한 공포, 부족적인 호전성, 배타의 정치는 모두 자유와 안전의 양극화가 지속하는 데서 기인한다. 양극화는 우리 사회를 사는 사람들의 무력감과 불안감이 증가하게 하고 새로운 개인주의가 표방하는, 자기구현과 자기주장을 가능케 하는 진정한 자유가 실현되지 않음을 뜻한다. 현 상태가 이대로 계속되는 한, 정치의 부족화, 인종 청소, 인간이 함께 존재하는 지역은 자꾸 분할될 것이다.

2.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사고하는 방식
-사유화, 진보, 빈곤의 새로운 역할, 교육과 정체성 찾기, 믿음과 보상


우리가 나아가는 길에는 끝이 있다는 환상, 이상향에 도달할 수 있다는 근대 초기의 환상이 와해되었다. 또 다른 변화는 근대화 과제와 의무의 탈규제화, 사유화이다. 인류에게 집단적으로 주어진 과제가 쪼개져서(‘개인화되어’) 개인에게 할당되었고 개인이 자신의 담력과 체력 등 자기가 가진 재원을 총동원해 자력으로 풀어야 할 과제가 되었다.
또 개인은 자신의 비참한 처지에 대해 아무도 탓할 수 없고, 자신이 실패한 원인을 자신의 나태와 게으름에서 찾을 수밖에 없으며, 실패를 바로잡으려면 스스로 더욱더 열심히 노력하는 방법밖에 없다. 이런 삶은 고통스러운 불안감을 점점 더 증가시킨다. 이제 공적인 공간을 지배하는 것은 사(私)이다. 따라서 공적인 공간에서는 점점 공적인 이슈가 사라지고 있다. 이제 우리의 과제는 뿔뿔이 흩어져버린 것들을 다시 묶어주는 일이다.
‘진보’는 역사의 속성이 아니라 현재의 자신감이다. 그러나 자신감이 진보에 대한 믿음을 뒷받침해주는 기반이라면, 우리 시대에 진보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세계가 진보하도록 앞에서 이끄는’ 주체가 없고, 주체가 있다 하더라도 이 주체가 세계의 형상을 개선하기 위해서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점점 불분명해지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빈곤은 또 어떠한가. 세계화, 탈지역화 되는 사회에서의 빈곤층의 새로운 역할은 어떤 것인가. 정치적 속박과 지역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경제는 급속히 세계화, 탈지역화되면서 세계의 빈곤층과 부유층의 간극을 넓히는 동시에 각 사회 내부에서 빈부의 격차를 심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빈곤층의 곤경을 함께 나누는 대신, 빈곤층이 처한 어려움과 그들의 두려움을 보며 겁을 먹는다. 빈곤층의 처지를 보고 빈곤하지 않은 계층은 “여유로운 삶은 보장된 것이 아니다. 오늘 성공했다고 내일 실패하지 말라는 보장은 없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한다. 이렇게 불확실한 삶은 계속된다. 불확실성의 정치경제는 탈 지역적인 금융, 자본, 무역 권력들이 지역정부의 규정들을 모두 철폐하기 위해 만든 규정의 집합이다. 결과적으로 불확실성의 정치경제에 힘이 된다. 이러한 정치로부터 권력의 분리는 종종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언급된다. 세계 시장과 금융의 응집된 힘에 맞먹을 만큼 강력한 세계 기구가 필요하다.
바우만은 대학의 가치 변화를 말한다. 대학은 이제 더는 가치를 창조하는 독점적인 특권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전문성과 능력에 대한 판단 기준은 이제 대학이 아니라 시장 원리와 기업이 만들고, 대학에서 배우고 가르치는 것은 기술 혁명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 대학의 유용한 역할이 있다면 구조적인 실업으로 어려움에 처한 사회에서 일시적인 피난처 역할을 하게 되었을 뿐이다. 앞으로 대학은 ‘고등 교육을 추구한다는 목적으로 모인 집단’의 다원성, 다양한 목소리를 활용해야 한다. 특정한 결과를 얻기보다는 조정 가능성에 중점을 둔 열린 과정, 영원히 미완성으로 남을 가능성을 회피하기보다는 성급히 마무리해 버리지 않는 태도를 유지하는 게 교육에서 필요하다고 바우만은 말한다.

평생을 걸쳐 어떤 인간이 될 것인가를 고민하고, 어떤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 근대적 의미에서의 ‘정체성 찾기’ 작업이었다면, ‘액체’ 근대인 우리 시대에는, 사회에서 개인의 위치만 유동적인 게 아니라 개인이 접근할 수 있고 정착하고자 하는 위치들 자체가 급속히 용해되고 있어서 ‘평생 과제’의 목표 역할을 할 수기 없다. 목표가 불안정하고 사라지기 쉬워지는 현상은 기술의 숙련 여부, 학력의 고저, 일에 적극적이고 소극적인 성향을 막론하고 모두에게 영향을 준다. 또 하나, ‘정체성’이 관심을 얻고 열정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공동체의 대리’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공동체의 부재를 메우기 위해 정체성을 추구하는 일에 골몰하지만 정체성의 추구는 사람들을 전보다 더 갈라놓고 고립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할까. 믿음이 사라진 시대에 믿음을 회복할 길은 없을까. 일반적으로 장기적으로 목표를 세우고 노력하는 데 호의적이지 않게 된 우리 시대에는 어떤 믿음도 갖기가 어렵다. 삶에서 중요한 모든 것들이 덧없고 사라지기 쉽고, ‘경쟁력’, ‘효율성’등의 변덕스러운 압력과 변화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좌우명이라고 할 만한 ‘유연성’은 권리라는 안전망이 동반되지 않는 일자리, 기간이 정해지거나 수정 가능한 계약직, 사전 고지나 실직수당도 없이 해고되는 일자리를 뜻하게 되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 세상을 한 번 쓰고 버리는 일회용품이 가득한 곳으로 인식하게 되고, 노동시장을 운영하는 자들이 채택한 ‘불안정화’ 정책은 생활 정책의 도움으로 강화된다. 인간의 결속, 공동체, 동반자 관계가 약해지고 와해하고 부패한다. 인간적 결속과 동반자 관계는 생산이 아닌 소비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인간관계는 다른 모든 소비 대상을 평가할 때와 똑같은 기준으로 평가된다.
삶이 분산되면 삶을 단편처럼, 개별적인 사건들의 연속처럼 살게 된다.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하면 존재가 파편으로 나뉘고 삶이 단편으로 쪼개진다. 불안감이라는 망령을 처치하지 않는 한 오래 지속되는 가치에 대한 믿음을 회복할 가능성은 요원하다

3. 우리의 행동 방식과 미래
- 윤리, 도덕성, 민주주의, 폭력, 에로티시즘, 그리고 영원이 사라진 미래


사랑에는 이성이 필요할까? 바우만은 ‘그렇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성이 사랑의 실책에 대한 변명으로 이용되고 무언의 윤리적인 명령이나 무조건적인 도덕적인 책임으로부터 벗어나 숨을 곳을 제공해준다. 이런 행동은 이성을 잘못 사용하는 행동이다. 이런 식으로 이성을 이용하면 우리가 처한 딜레마에 대처하고 헤쳐나갈 기회 대신 도덕적인 곤경으로부터 빠져나갈 길만 마련해준다.
권력은 자본이라는 형태로, 특히 금융자본이라는 형태로 흐른다. ‘경제’가 점점 정치적 통제를 벗어나고 있으며, 이동의 자유와 제약 없이 목적을 추구할 자유를 누리게 된 데 반해 정치는 여전히 지역적 특성이 야기하는 온갖 제약을 감내하고 있으므로 정치는 ‘새로운 윤리’를 실행할 주체가 될 수 없다. 주권을 뒷받침하는 경제적, 군사적, 문화적 요소는 이제 모두 와해되었고 오늘날의 국가들은 자신들이 권력들이 원하는 바를 대신 집행하는 기관으로 변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엘리트들 가운데 지식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 정책이나, 미래에 대한 구상, 사회정의의 본보기를 제시하는 이는 없다.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두 가지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 한 가지 위협은 공적 권력이 ‘좋아 보이는 것’을 입법화하고, 제정한 법을 집행하는 능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또 다른 위협은 공공 이슈와 사적인 문제 간의 소통과 해석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외로운 개인들은 광장을 찾았다가 다른 이들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외로운 개인일 뿐이라는 사실만 깨닫게 된다. 외로운 개인들은 더욱더 분명하고 절실해진 자신의 외로움을 안고 집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미래 민주주의의 문제점이다. 공공 기관들이 무력해지면서 사람들은 공공의 문제에 관심을 잃고 함께 힘을 모아 문제를 해결할 의지를 잃는다. 사적인 고통을 공공의 이슈로 승화시킬 능력과 의지가 약해지면서, 이러한 무력감을 조장하고 그로부터 자양분을 얻은 세계적 권력은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가 쉬워진다.
우리는 지금 근대 사회의 탄생 못지않게 심오하고 포괄적인 전환기에 살고 있다. ‘폭력적인 시대에 살고 있다’는 표현과 폭력의 총량과 그 잔혹성이 증가하고 있다. 이전에는 폭력이 아니었던 것들이 오늘날에는 폭력으로 분류되고, ‘가족’폭력과 ‘이웃’폭력이 증가하고 있다. 새로운 종류의 폭력이 등장한 게 아니라 오래전부터 존재해왔으나 예전처럼 기꺼이 참지는 않겠다는 거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세계화 시대에는 폭력 또한 ‘유동적’이다. 새로운 양상의 전쟁은 원격 전쟁, 치고 빠지는 전쟁이다. 새로운 형태의 ‘국제전’의 목표는 영토 확장이 아니라 아직 닫혀있는 문호를 세계 자본의 자유로운 흐름에 활짝 열어젖히는 것이다. 세계 자유무역과 세계 자본의 자유로운 흐름을 표방하는 정치를 추구하는 이들은 이 ‘유동적 폭력’을 선택하지만, 현재로서는 이를 막을 방법도 대안도 없다.

오늘날 에로티시즘은 성적인 생식이나 사랑과의 연합에서 독립했다. 사실상 포스트모던의 성은 오르가슴이 전부다. 우리 시대의 에로티시즘은 ‘유연성’이라는 정체성에도 안성맞춤이다. 부모/자녀 관계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인간관계가 포스트모던 에로티시즘의 혁명 시대를 맞아 성적 의미가 재평가, 재협상 되고 있다. 문화는 성적 쾌락을 찬미하고 생활 세계의 구석구석에 성적 의미를 부여한다. 또한 감각을 추구하는 인간들에게 성적주체로서의 잠재성을 충분히 발휘하라고 부추긴다. 그러나 문제는 모든 성적 만남에서 우리는 모두 욕망의 대상인 동시에 욕망의 주체라는 점이다.
이제 역사상 처음으로 세월을 소중히 여기고 세월을 보람 있게 보내는 일이 합리적으로 여겨지지도 않고 이를 뒷받침해줄 제도도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 되었다. 영원이라는 느낌은 일시적인 흥분에 불과하고, 영원 자체가 불필요하게 되고, 지속적인 ‘일체성’이라는 특성은 혐오스러운 것이 된다. 어찌 보면, 불멸이 와해되면서 유한한 삶이 새로이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예술마저 불멸에서 멀어지고, 고전적 의미로서 불멸과 영원한 감동에 기댔던 예술의 가치와 명성도 달라졌다. 오늘날 미술은 덧없음, 우발적임, 소멸성을 다룬 예술품들을 찬양한다. 신흥 엘리트 계층은 소유물에 집착하지 않는 게 고상한 태도라고 여기면서 사물에 대한 애착을 단호히 거부하고 사물의 신선함이 사라지면 미련 없이 버린다. 이미 존재하는 형태들을 끊임없이 파괴하고 새로운 형태를 실험한다.

이렇게 형태의 파괴가 이루어지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우리는 아무도 거주해보지 않은 새로운 영토에 도달했다는 점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유한한 인간들은 불멸 없이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바우만은 말한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 처한 적이 없다. ‘여기 존재함’이 어떤 것인지 그것이 어떤 지속적인 결과를 초래할지는 앞으로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