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마음우주

<민주주의를 어떻게 변화시킬까-민주주의,시민성,봉기> 세미나 개설 공지

<시민행성>은 강좌와 더불어 강의 이해의 심화와 공부의 지속성과 가치의연대를 공유하는 이들의 실천성을 겸비한 인문네트워크를 양성다는 취지에서 각 강좌와 관련하여 별도의 세미나를 개설합니다.

세미나의 텍스트는 참여자에 한해서 시민행성에서 책구입을 지원합니다

세미나 신청은 네이버 카페 <시민행성> http://m.cafe.naver.com/citizenplanet

(자세한 사항은 공지사항 참조)

 

진태원 선생님께서 추천해주신 <민주주의를 어떻게 변화시킬까-민주주의, 시민성, 봉기>와 관련한 세미나 텍스트는 다음과 같습니다.

 

<포스트민주주의> 콜린 크라우치, 이한 역, 미지북스

<정치체에 대한 권리> 에티엔 발리바르, 진태원 역, 후마니타스

 

 

 

 

고장난 민주주의인가, 포스트민주주의인가?
민주적 절차로 선출된 정치인이 국민을 배신한다. 심지어 우리는 “선거 때는 무슨 말이나 할 수 있는 것 아닌가?”라고 말하는 대통령을 지도자로 뽑아버렸다. 그 대통령은 검역 주권을 다른 나라에 넘겨버리면서 국민적 저항에 부딪힌 바 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적법한 절차에 의해 당선되었으므로 나의 정당성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명박 정부는 부유층에는 세금 세일, 서민에겐 복지 축소를 선사하고 ‘선진화’라는 미명하에 267조 원 규모의 공기업들을 매물로 내놓고 있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일까? 민주주의가 고장나버린 것일까? 영국의 저명한 사회학자 콜린 크라우치는 이러한 현상을 ‘포스트민주주의’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며 설명하고 있다.

포스트민주주의의 도래.
‘포스트민주주의’란, 절차적이고 형식적인 민주주의가 유지되고 법치 국가의 성격이 유지됨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이 민주적 절차를 통해 도달하려 한 목적을 선출된 정부가 배신하는 역설적인 상황을 규정하는 말이다.
오늘날 선거는 유권자들의 무관심과 냉소 가운데 치러지는 정치권의 쇼 비즈니스로 전락했다. 정당 간의 정책이나 이념적 차별성이 모호해지고, 후보자 개인의 이미지가 중요한 사회적 이슈를 대체하고 있다. 선거란 민의를 반영하는 정치적 대결의 장이 아니라, 사실상 마케팅과 광고 기법이 적용되는 통제된 스펙터클에 불과하다.
‘진짜 정치’는 바로 그 뒤에서 이루어진다. 선거를 통해 일단 선출된 정부는 기업들의 비즈니스 로비를 받으며, 공공 부문을 팔아치우거나 민간 위탁을 주는 등 막후 거래의 참여자가 될 뿐이다. 단적으로 우리는 지난 서울시 교육감 선거를 통해 구체적인 사례를 확인했다. 교육 시장 자유화를 지지하는 공정택 후보와 학원계의 큰손들 간에 이루어진 금전 거래는 포스트민주주의 시대의 진짜 정치가 무엇인지 확실히 보여준다.
콜린 크라우치의 ‘포스트민주주의’ 개념은 이런 현상을 경제적 차원에서 신자유주의의 확장으로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정치적 차원의 메커니즘을 규명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오늘날 교육, 의료, 보건, 에너지 분야에서, 그리고 심지어 먹는 물에 이르기까지 시민의 기본적인 권리로 인식되던 공공 서비스가 급속히 이윤과 사업의 영역으로 재편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과정은 모두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이루어진다. 즉, 국민의 보편적 요구보다는 기업 엘리트의 특수한 이해관계가 더 잘 관철되는 의사결정 구조가 포스트민주주의 정치라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역사의 포물선 궤적’을 따라 움직인다.
콜린 크라우치는 이런 현상이 단지 대의제의 딜레마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등장이라는 역사적 요인과 진행 과정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20세기 민주주의의 역사는 노동-자본 간의 대결과 궤를 같이한다. 저자는 전후 약 25년의 기간을 '민주주의의 시대(democratic moment)'라고 말하는데, 이 시기에 정당은 계급 관계에 기반을 두고 활동했으며, 일국적 차원의 계급타협, 즉 코포라티즘 체제가 정치의 기본 프레임을 구성하였다. 이러한 체제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부상과 함께 붕괴했다. 노동자 계급의 쇠퇴로 인해 정당 정치가 계급 관계를 더 이상 대변하지 못하게 되었고 다국적 기업이 신자유주의의 흐름 속에서 강력한 제도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민주주의의 형식과 절차는 남아, 포스트민주주의의 식어버린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콜린 크라우치는 이를 두고 민주주의가 ‘역사의 포물선’을 따라 움직인다고 표현한다. 시간의 흐름을 x축으로 하고, 민주주의의 정치적 확장과 수축을 y축으로 하는 아래의 그래프를 보라. 포스트민주주의는 특권층의 권력이 시민의 권리를 압도했던 민주주의 이전 사회와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역사는 한편으로 민주주의의 시대를 규정짓던 특징 역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원을 완전히 한 바퀴 돌아 과거로 회귀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지점, 즉 포스트민주주의의 시대로 미끄러져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주제를 한마디로 집약해서 말한다면 시민 불복종이 어떤 의미에서 국가 또는 정치체의 토대를 구성하는지 이론화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정치체의 토대로서 시민 불복종이라는 생각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너무 소박한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방종과 일탈, 불법 행동을 조장하려는 무책임한 발상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왜냐하면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나 최근 몇몇 정치철학자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종말론적 관점을 견지하는 사람들에게 시민 불복종은 계급투쟁이나 혁명 같은 본질적인 개념에 비하면 얼마간 사소한 도덕적 저항이거나 심지어 기본적으로 부르주아적 질서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개혁의 시도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법치국가의 원칙과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질서를 수호하려는 입장에서 본다면, 여타의 불법행위와 하등 다를 바 없는 시민 불복종 행위는 정치체의 근본을 뒤흔드는 행위일 뿐 어떤 의미에서도 그 토대로 간주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발리바르의 관점은 양쪽 모두에게 비난받기 좋은 입장일 것이다.

시민 불복종을 정치체의 토대로 사고하려는 발리바르의 관점은 한편으로 정치체를 시민권 헌정(constitution of citizenship)으로 개념화하는 것에 근거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시민권=국적”이라는 등식이 근대 정치체, 곧 국민사회국가의 핵심을 이룬다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