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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의 책

폴 리쾨르 <해석에 대하여>



 

 

『해석에 대하여 : 프로이트에 관한 시론』은 폴 리쾨르의 철학에서 독특하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독자의 이해를 위해서 매우 거칠고 도식적인 설명방식이 허락된다면 리쾨르의 철학은 초-중-후기라는 구분을 사용해서 파악할 수 있다. 초기 리쾨르의 철학―주로 1950년대에 이루어진―은 현상학적 기술을 최대한 활용한 세 권의 책 『의지적인 것과 비의지적인 것』, 『잘못을 범하는 인간』, 『악의 상징』으로 대변되는 의지의 현상학으로 표현할 수 있다.

 

 삶의 세계 속에 거주하는 인간의 의지와 동기, 여기서 비롯되는 실천들이 세계 안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리고 인간 능력의 유한성과 그 인간이 자신의 유한함을 딛고서 무한에 도달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잘못과 오류 가능성, 그러한 잘못이 극대화되어 표현되는 악이라는 현상을 현상학적으로 기술한 것이 초기 리쾨르의 철학이었다. 이러한 리쾨르의 철학은 악이라는 상징적 현상이, 상징 특유의 성격 때문에 단번에 기술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로 인해 일대 변형을 일으키게 된다. 본서에서도 여러 차례 강조되지만 상징은 인간의 문화적 삶 속에서 이중 의미를 갖는 표현들을 뜻한다. 상징이 일의적으로 곧장 표현되지 않는 것이기에 현상학자가 그것을 현상학적으로 기술해내지 못하는 일종의 좌절이 일어난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리쾨르는 해석학을 채택한다. ‘부분으로 전체를 이해하고 전체로 부분을 이해하는’ 해석학적 순환을 거치는 이해의 작업을 통해 리쾨르는 우리 삶의 여러 문화적 표현들을 그러한 순환이라는 우회를 거쳐 이해해 보고자 시도한다.

 

 

이러한 리쾨르의 철학은 초-중-후기를 관통하는 그의 최고의 철학적 과제인 ‘개념을 통해 인간의 실존을 이해하는 일’과 접목된다. 그는 반성철학의 전통에 서서 인간의 자기 이해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끊임없이 탐구하면서 현상학을 거쳐 해석학으로 이행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본서는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이 책에서 그는 해석이라는 전통적 개념을 다시 정의하여 나 자신에 대한 정립과 이해를 목표로 삼는 반성철학의 새로운 방향 설정을 위해 해석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반성철학이 현대의 여러 도전들에 의해 그 위상 자체가 흔들리는 시점에서 그는 그러한 도전들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마주함으로써 반성철학에서 제기하는 ‘나’, 또는 ‘주체’를 새롭게 이해해 보려고 했다.

 

본서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그러한 현대의 도전들 가운데서 리쾨르가 주목한 것은 프로이트이다. 일차적으로 반성철학에서 말하는 ‘나’는 전통적으로 데카르트 철학에서 내세운 코기토처럼 자명한 제1원리로서의 ‘나’이다. 하지만 리쾨르는 프로이트(또한 니체, 마르크스)에 의해서 이 자명한 제1진리로서의 ‘나’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프로이트의 공격에 상처를 입은 코기토를 새로운 방향에서 재구성해야 온전한 ‘나’에 대한 물음이 가능해진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리쾨르 특유의 주체철학은 1990년에 나온 『한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에 와서야 그 완성적인 모형을 구축한다. 이것이 그의 후기 철학의 결실이다.

  그렇다면 본서는 어디까지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가? 우선 리쾨르는 앞서 말했듯이 특별히 해석 개념과 상징 개념을 새롭게 정의한 후, 이것이 영미철학의 논리학적 사유전통의 공격에도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지 철학사적 전거를 통해 해명한다. 그리고 코기토에 대한 프로이트의 도전을 인정하고 반성철학이 큰 방향에서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제시되는 리쾨르의 입장들은 이후 그의 해석학과 주체철학 논의의 시발점이 되는 중요한 대목이고, 이 책 1부의 주된 내용을 이루는 주제들이다.

 

논의의 순서상 여기서 리쾨르의 새로운 주체 이해가 등장하면 좋겠지만, 그는 이것을 차후의 과제로 일단 남겨둔 채 프로이트와의 적극적 대화를 시도한다. 찰스 테일러가 ‘경계 없는 철학자’라고 리쾨르를 칭송했던 것처럼 그는 단지 프로이트의 입장만을 확인하고 수용하는 척하면서 프로이트를 제쳐두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시대의 가장 큰 이론적 반향을 일으킨 이 거장과 대화를 시도함으로써 반성철학이라는 경계를 넘어선다. 물론 반성철학이라는 경계를 넘어섰다고 해서 반성철학이라는 자신이 기반으로 삼은 경계를 완전히 허문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그 경계의 문을 열고 나가서 프로이트마저도 자신의 경계 안에 두었다는 편이 나을 것이다. 즉 자신의 경계 안에만 머무른 것이 아니라 경계 안/밖을 넘나드는 시도를 한 것이다. 

  이 시도는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가? 이 시도는 사실 유행만을 타고 급작스럽게 나온 것이 아니다. 1965년 이 책이 세상에 빛을 보기 전에 그는 이미 약 10여 년 전부터 자신의 나라인 프랑스를 넘어 미국의 예일대학, 벨기에의 루뱅대학 등지에서 프로이트에 대한 강연과 연구에 몰두했다. 프랑스에서는 그 당시 구조주의의 영향을 입고 프로이트주의의 전도사 역할을 담당했던 라캉의 세미나에도 참석하는―비록 큰 실망감만을 안은 채로 세미나에 끝까지 참석하지 않기는 했지만―열의를 보였다. 바로 이러한 오랜 숙성 끝에 그는 본서를 내놓은 것이다. 그 주된 결실들이 주로 2부와 3부의 내용을 수놓고 있다. 1부가 자신의 철학적 기획과 프로이트와의 접속 형태를 에둘러서 표현했다고 한다면, 2부는 프로이트에 대한 본격적 독해로 점철되어 있다.

 

여기서는 그 당시 유행하던 구조주의적 프로이트 해석이나 미국의 신프로이트 학파 등의 해석과는 전혀 무관하게 오직 프로이트의 텍스트 자체만을 붙잡고 씨름하는 리쾨르의 독해가 내용 전반을 구성하고 있다. 프로이트의 ‘과학적 심리학’, ‘문화 해석’, ‘종교 이해’ 등의 주제부터, 일차 지형학에서 이차 지형학으로의 이행, 현실원칙과 쾌락원칙의 투쟁에서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투쟁으로의 이행에서 나타나는 프로이트 기획의 내용과 의도 등을 자신의 관점에서 재구성한 것이 2부의 내용이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개진하기보다 자신의 눈으로 이해한 프로이트를 설명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성급한 독자라면 2부를 읽고 이 책이 그저 프로이트에 대한 해설서나 입문서에 지나지 않는다고 불평할 수 있을 정도로 리쾨르는 오직 프로이트 텍스트 자체에 대한 읽기와 해설에 집중한다. 실제로 라캉 학파의 지지를 받았던 미셸 토르는 ‘별 볼일 없는 프로이트주의자의 교과서’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서를 혹평하기까지 했다.
 

 

책을 끝까지 읽지 않거나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기 좋아하는 이런 사람들의 예견에 담담하게 응수하는 듯 리쾨르는 3부를 내놓고 있다. 여기서 그는 프로이트에 대한 철학적 해석을 적극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이 3부의 내용이 ‘철학적 해석’이라는 점이다. 사실 영어 번역자가 이 책을 ‘프로이트와 철학’이라고 이름하고 있고, 아직도 영어권에서 이 책이 그렇게 회자되고 있다는 사실은 본서의 그러한 철학적 측면에 주목한 데서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그 당시(혹은 지금도) 프로이트를 주로 적용한 영역은 심리학이나 상담학, 또는 기타 임상의학적 접근에서였다.

 

철학의 입장에서 프로이트를 적극적으로 읽어내는 시도는 그다지 많지 않았으며, 간혹 철학적 함의를 담은 프로이트에 대한 해석들이 여기저기서 제기되었지만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프로이트와의 철학적 대화를 전면적으로 시도한 적은 거의 없었다. 특별히 구조주의가 득세하던 시대상황에서 반성철학이라는 흘러간 조류처럼 보이는 입장에서 프로이트를 적극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실제로 이 책이 출간된 이후 라캉 학파의 공격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리쾨르에게 가해졌다. 그를 은근히 지지해 주던 사람마저 이런 시류에 못 이겼는지 일종의 배신을 감행했다는 이야기마저 전해질 정도이니 그가 얼마나 어려움에 처했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3부에서 리쾨르는 프로이트의 철학을 ‘주체의 고고학’으로 규정하여 이 철학이 주체철학의 연장선상에서 해석될 수 있다는 입장을 내놓는다. 또한 그러한 ‘주체’를 주요 논의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프로이트 안에 은밀한 해석학적 경향이 숨어 있다는 주장도 내놓는다. 사실 이 주장은 프로이트를 과학으로 보는 당대나 지금의 여러 입장들에서 보면 어불성설에 지나지 않는 말일 것이다. 혹시 그런 입장을 강하게 취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사실 이 책을 보고 실망감을 감추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리쾨르가 프로이트 사상을 철학으로 간주하여 적극적으로 해석해내려고 했다는 점이고, 이에 그의 입장이 다른 측면에서 보면 과학주의적 심리학을 개진한 영미권의 공격에 대한 일종의 방어막 역할을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철학으로 간주했다는 것은 프로이트의 위상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것이지 절대 프로이트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을 과학으로 보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프로이트에 대한 부정으로 여겨졌던 것 같다.

  이러한 입장 아래 리쾨르는 프로이트 안에 있는 암시적 목적론을 밝혀냄으로써 헤겔적인 변증법의 관점에서 프로이트를 이해해 간다. 즉 주체의 변증법적 자기 이해의 과정이 미미하지만 프로이트 안에 스며들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리쾨르가 프로이트를 목적론자로 본 것이 절대 아니라는 점이다. 단지 암시적, 함축적인 차원에서 목적론이 내포되어 있으므로 우리가 프로이트 사유를 일정 부분 주체의 ‘자기 이해’의 도정으로 읽어낼 수 있다는 점을 그는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이를 통해서 불투명한 코기토가 꿈으로 표현되는 상징이나 기호 등의 매개를 거쳐 점점 우리에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우리는 삶의 도상 속에서 그런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이해하고 해석해 나간다는 점을 프로이트의 입장을 빌려 이야기했던 것이다.

  마지막에 리쾨르의 프로이트에 대한 보다 적극적 비판이 이루어지는 대목은 사실 문화와 종교에 대한 프로이트의 환원주의적 입장에 관한 부분이다. 그는 프로이트의 지나친 무의식 환원주의 탓에 종교와 신앙의 가치가 적절하게 평가받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사실 이 대목도 종교인이 철학자가 될 수 없다는 일부 철학자들의 편견으로 인해 상당히 공격받은 대목이다. 하지만 알랭 드 보통이 종교를 신앙인의 전유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하여 종교의 새로운 가치에 주목했던 것처럼, 리쾨르 역시 종교, 특히 그 중에서 기독교의 적절한 가치를 드러내서 사유의 원천으로 공유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리쾨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바로 이런 맥락에서는 프로이트의 ‘불신앙’이 오히려 해가 된다는 것을 또한 밝히고 있다.
  사실 본서에는 이 외에도 다양한 주제들이 프로이트를 둘러싸고 농축되어 있다. 사실 리쾨르의 철학은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널리 흡수되고 있지는 못한 것 같다. 반성철학이라는 전통적 입장을 고수하는 것 때문인지 시류에 맞춰 독자들에게 접근되지도 못하고 논쟁대상에도 잘 오르지 못한다. 그의 엄청난 독서량과 포괄적인 주제 범위, 철학사적·문화사적 지식의 배경 탓에 실제로 리쾨르의 철학에 접근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꼼꼼하게 시간을 두고 들여다 보면 분명히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

 

특별히 본서는 리쾨르 철학 자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책이고, 프로이트를 색다른 시각에서 이해하는 데도 굉장히 도움이 된다. 라캉이나 지젝 식의 관점이나 미국의 심리학적 관점 등 우리나라에서 많이 회자되고 있는 프로이트에 대한 여러 해석들과 비교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1960년대 보여주었던 프랑스 일부 연구자들의 일방적인 관점만 아니라면 어떤 시각에서 보아도 큰 사유의 자양분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저자 : 폴 리쾨르 Paul Ricoeur

1913년 프랑스 남동부 발랑 시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집안은 독실한 프로테스탄트 가정이었다. 2세 때 부모가 사망하여 브르타뉴 렌느 시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성장하고 대학을 졸업하였다. 1935년 파리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였고 유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로 알려진 가브리엘 마르셀에게 철학과 신학을 배웠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가 독일군에 잡혀 스위스에서 5년간 포로생활을 하였다. 당시 후설의 저서들을 탐독한 것이 계기가 되어 후설 연구가로도 알려졌다. 1950년 후설의 《현상학의 이념들》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프랑스에 소개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현상학을 통하여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밝히고 그러한 유한성으로 초월적 존재인 신을 해명하려고 노력하였다. 

1948∼1956년 스트라스부르대학, 1956년부터는 파리대학 철학교수로 재직하였다. 이 기간 동안 《의지적인 것과 비의지적인 것 Le volontaire et l’involontaire》(1949)에서 의지에 관한 현상학적 기술을, 《유한성과 죄악 가능성 Finitude et culpabilite》(1960)에서 종교적인 상징에 대한 해석학을, 《해석에 대하여 De l’interpretation》(1965)에서 프로이트를 재해석하는 등 활발한 연구활동을 하였다. 1966년 그리스도교 좌파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위하여 낭트대학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1968년 학생혁명이 좌절되자 급진적인 학생들과 지식인들로부터 외면당하여 1970년 해임되었다. 그 뒤 시카고대학과 파리대학을 중심으로 강의와 저술활동을 하였다. 이후 그 동안 몰두했던 해석학의 주제도 상징에서 텍스트로 바뀌게 되었다. 

그는 상징언어에 대한 해석의 폭이 너무 좁다고 여겨, 텍스트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인간 존재를 이해하려고 시도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물로 1975년에 《살아 있는 메타포 La metaphore vive》를, 1983·1984·1985년에 연속으로 《시간과 이야기 Temps et recit 1, 2, 3》를 펴냈다. 1990년에는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 Soi-meme comme un autre》을, 1992년에는 대표 논문을 모은 《강좌 Lecture》를 출간하였다. 2005년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