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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학교

<2013, 무엇을(어떻게) 희망할 수 있을까-희망과 구원에 관한 반철학 우화들> 세미나 개설 공지

<시민행성>은 강좌와 더불어 강의 이해의 심화와 공부의 지속성과 가치의연대를 공유하는 이들의 실천성을 겸비한 인문네트워크를 양성다는 취지에서 각 강좌와 관련하여 별도의 세미나를 개설합니다.

세미나의 텍스트는 참여자에 한해서 시민행성에서 책구입을 지원합니다

세미나 신청은 네이버 카페 <시민행성> http://m.cafe.naver.com/citizenplanet

(자세한 사항은 공지사항 참조)

 

함돈균 선생님의 세미나 추천 텍스트는 다음과 같습니다.

 

알랭 바디우 <윤리학> 이종영 역, 동문선

알랭 바디우 <사도바울 - 제국에 맞서는 보편주의 윤리를 찾아서> 현성환 역, 새물결

 

 


"바디우가 "인권의 윤리" "차이의 윤리"와 형성하는 쟁점"
이 책은 펼치자 마자 몇가지 쟁점을 즉각 제기한다. 바디우가 예의 그 엄밀한 논리로 자신의 주장을 펼쳐가는 이 책은, '인권의 윤리'와 '차이의 윤리'라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로 시작한다.

바디우는 인권의 윤리라는 것은 '악'을 규제할 수 있는 것으로서 윤리를 정의한다는 점에서 제한적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러한 '인권'의 잣대는 상황의 구체성에서 도출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이한 상황 속에서 '인권'의 담지자의 시각(서양인)을 절대적으로 정당화한다. (그 결과 코소보 전쟁과 같은 '인도주의적 개입'을 '인권'의 이름으로 자행할 수 있게되는 것이다.)
한편, 바디우는 차이의 윤리에 대해서도 그것이 가능한가를 되묻는다. '차이의 윤리'라는 관념의 근거를 마련한 것으로 이야기되는 레비나스의 '진의'가 다른 것이었다는 비판으로 시작한다.(다소 훈고학적이기는하다.) '차이의 윤리'는 사실상 동일자에의 포섭을 전제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차이'의 인정이라는 것은 전적으로 다른 타자에 대한 인정이 아니라 (서양적) 정체성을 공유하는 집단에게만 인정된다. "나처럼 되어라 그러면 너의 차이를 존중하겠다"라는 것.

이런 비판하에서 바디우가 정의하는 윤리란 무엇인가?
바디우는 윤리는 '문화적 상대주의'에 입각해서는 존재할 수 없으며 오로지 '진리'와 관련해서만, 특정한 진리들을 도래시키는 노고의 윤리만이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진리는 특수한 상황에서 '사건'을 통해서 비가역적으로 도래하지만 그것을 유지시키기 위한 일관성이 윤리를 정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처럼 윤리 또한 복수--정치, 사랑, 과학, 예술--로서 존재한다. '일반적인' 윤리는 없다. 특정한 정황에 의해 주체가 구성되고 그 주체에 대해서 윤리가 정의될 뿐이다. 바디우는 여기서 '주체'라는 것은 진리의 도래 이후에 가능한 '어떤 자'에 속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일반적으로 이데올로기에 의해 존재하는 모든 개인들을 주체로 보는 시각과는 다르다는 점을 주의해야한다.)
따라서 바디우는 '진리의 윤리학'을 제기한다. 그것은 "그 진리의 과정이 도출시키는 주체의 구성속에서 어떤 자의 현존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떠한 사건을 통해(그것은 상황에 따라 다양할 수 있다) 도래한 진리는, 어떤 자의 안에서 그 진리를 유지하고자하는 강력한 욕망을 만든다. 그것이 유지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윤리의 문제가 된다.

그렇다면 '악'은? 그것은 윤리의 잔여, 혹은 부재인가?
바디우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것은 오히려 진리를 도래시키는 사건의 시물라르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절대적 악'으로 표상되는 나치즘은 그들이 정권을 장악하는 정치적 사건을 진리의 절대적 도래로 표상하고 그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면서 발생했다.

그럼 이것은 윤리와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는가? 사건과 시물라르크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바디우는 그 차이를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사건에의 충실성과는 달리, 자신의 단절성을 공백의 보편성에 의해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 집합('독일인' 혹은 '아리안족')의 닫혀진 특수성에 의해 규제"라는 것이다.(그래서 시물라르크로서 악의 형식적 특질은 진리의 형식적 특질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 부분 역시 들뢰즈와 논쟁적일 수 있는 부분이다.)
한편, 윤리적 시도가 실패할 경우에는? 한편으로 진리에 대한 배반에서 그것이 발생한다.그것은 단순히 포기가 아니라 문제가 되는 불사적 존재(진리)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며, 그것의 적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배신한 혁명가는 정 반대 입장으로 돌아선다.) 또 한편으로 진리의 힘에 관계되는 문제가 있다. 즉 진리의 힘이 전능하다고 믿으면서 발생할 수 있는 파국이 윤리적 시도의 실패, 악의 도래를 가능하게 한다.

거칠게 바디우의 논의를 요약-소개했지만, 사실은 대단히 엄밀한 논리적 전개를 보여준다. 다소 난해하기는 하지만 논리적 단절들이 없이 꼼꼼하게 논리전개를 하고 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 박준형

 

 

이처럼 기이한 만남: 라캉과 마오주의에 기반한 반(反)철학의 대표자,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의 비관과 절망의 시대에 그리스도의 사도 바울을 만나다.

포스트모던의 해체 철학은 9.11 테러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에게 멋진 신세계를 약속해주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포스트모던 이후의 현실 세계는 지하드라는 성전(聖戰)과 테러와의 전쟁이 전 지구적 규모로 맞붙고, 진리의 보편성에 대해서는 극한적인 상대주의가 난무하는 디스토피아로 순식간에 변해버리고 말았다. 종교는 사랑의 종교이기를 그치고, 공항에서의 지문 검색과 길거리의 요소요소에 비치된 감시 카메라가 상징하듯 정치는 공포와 감시에 기반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에 이러한 현실을 고민해야 하는 철학은 ‘주체의 종말’, ‘대서사의 죽음’ 등으로 상징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을 통해 자살해버린 꼴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반(反)철학과 비관주의가 횡행하는 우리 시대에 일찍부터 반철학과 함께 새로운 주체, ‘해체주의’에 정면으로 맞서 진리는 오직 체계적일 뿐이라는 주장을 일관되게 펼쳐온 ‘사건’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가 이 책에서 바울과 만나는 방식은 기발한 만큼이나 이러한 우리 시대에 대한 유비로 가득 차 있다. 로마 제국은 오늘의 미국으로 유비된다. 그리고 로마 제국을 ‘정신’으로 삼키게 되는 기독교(일찍이 헤겔은 이를 두고 세계 역사의 최대 미스터리라고 한 바 있다)는 제국의 변방에서 최초의 신앙을 싹 틔우고 있었지만 그것은 유대교 공동체에 근거하려는 12제자의 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지상에서는 그리스 ‘철학자’들이 철학적 지혜로 이 세상을 살아나갈 수 있다고 믿고 있었지만 그것은 온전히 그리스 세계에 갇힌 철학을 위한 ‘지혜’일 뿐이었다. 이때 기독교도들을 때려잡으려 다니던 사울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나 바울이 된다.
바디우는 이러한 식으로 2,000년 전의 인물, 사도 바울을 우리 시대로 소환한다.

되살아오는 사도 바울,
모든 특수주의와 사이비 보편성을 거부하고 진정한 보편성을 위해 싸우다

그렇다면 왜 사도 바울인가? 그것은 이 책 3장에서 소개되는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의 유작 시나리오가 잘 보여주듯이 어떤 의미에서는 바울이 우리와 너무도 밀접한 동시대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며, 또한 특수주의 그리고 (법률적 혹은 경제적인) 추상적 보편성과 단절하고 보편적 개별성의 조건을 탐구하는 것이 바로 그가 하고자 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바울은 로마 제국의 법제와 같은 국가적 일반성, 그리스의 철학적.정신적 담론과 같은 이데올로기적 일반성, 그리고 유대의 율법주의로 대표되는 공동체주의(코뮌주의).특수주의를 모두 단호히 거부하며 보편적 개별성을 추구했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갈라디아서', 3장 28절)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 바울에게(그리고 바디우에게) 진리란 “모두에게 제공되고 말 건네지는” 것이며, “어떤 귀속 조건도 이러한 제공과 말 건넴을 제한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알랭 바디우에게 사도 바울은 기독교라는 종교에 국한된 인물이 아니다. 다시 말해 바디우는 바울을 종교라는 층위에서 읽어내지 않는다. 그에게 바울은 “보편성의 반철학적 이론가”이며 보편주의의 실현을 위해 싸우는 행동가이자 투사, 그리고 조직가이다(바디우는 바울을 “모호한 마르크스를 그리스도로 삼은 레닌에 비교”한다). 예컨대 각지를 돌아다니며 유대인, 이방인을 모두 포함하는 신앙 조직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바울이 예루살렘의 (그리스도를 직접 수행했던) ‘역사적’ 사도들과 의례 문제(그리스도교도가 된 이방인들에게 할례 등의 유대 의례를 행하게 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벌였던 갈등은, 바디우가 보기에 바울의 보편주의와 역사적 사도들의 특수주의(유대 공동체주의) 사이에 벌어진 투쟁이었다.

 

이와 같은 전제하에 알랭 바디우는 사도 바울의 사상과 그가 쓴 것으로 여겨지는 성경 구절들을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재해석해낸다. 우선 그는 바울이 복음서에서 말하는 예수의 행적이나 가르침에 대해서는 거의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것, 그것 하나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여기서 죽음과 부활은 결코 생물학적인 사태가 아닌 것으로 해석된다. “육체에 속한 생각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영에 속한 생각은 생명입니다”('로마서', 8장 6절)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 바울이 말하는 죽음은 하나의 사유이자 분열된 주체의 두 갈래 길 중 하나라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은 운명이 아니라 선택이 되며, ‘죽음을 향한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주체의 분열적 구성 안으로 진입하는) 죽음의 길만이 있을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부활 역시 이러한 죽음에 대한 승리, 이러한 “죽음을 죽여버리는 것”이 되며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사건은 그 승리의 가능성을 보편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죄, 율법,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 등의 개념이 정교하게 다시 해석되며, 너무도 유명한 세 단어 ― 믿음, 희망(소망), 사랑 ― 가 확신, 확실성, (보편적 힘으로서의) 사랑 등으로 다시 명명되고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새로운 얼굴의 바울, 우리 사회를 향해 말 건네고, (신자건 아니건) 우리 모두를 향해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해 눈물짓고, 위협하고, 용서하고, 공격하며, 부드럽게 포용하는 바울과 만나게 된다. ‘하나의’ 진리(그리고 일신론)에서 ‘하나’란 바로 “예외가 없음”, “모두에 대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만남을 통해 차이에 대한 관용이라는 미명하에 보편적 진리에 대한 탐구는 애초에 포기되고, 자본이라는 추상적 보편성만이 전 세계를 지배하는 이 시대를 뚫고 헤쳐 나갈 사유의 실마리를 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