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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학교

2강 < 바보가 현자에게 말했다 "적들이여, 적이란 없다네"> 강의 자료

 

예외들 또는 좁은 문 -메시아적 시간으로서의 문학 

 

함돈균

 
 

 

길에서 잠든 사람이 눈을 감은 채 긴 이야기를 시작하자
기도하던 여자들은
어디에서나 자라나는 묘지를 바라보았다
이장욱 불가능한 이야기
 
 
   우애(우정)의 정치학
   자신의 책 전체를 수수께끼들로 가득 채웠던 니체의 아포리즘 중에서도 악명이 높은 하나의 아포리즘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그러면 아마 누구에게나 이렇게 외칠 수 있는 더 즐거운 시간이 도래할 것이다.
   “친구들이여, 친구라는 것은 없다네!” 죽어가는 현자(賢者)가 이렇게 외쳤다.
   “적들이여, 적이라는 것은 없다네!” 살아있는 바보, 나는 이렇게 외친다.
                                                  - 니체(F.Nietzsche),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중에서
 
   이 아포리즘은 일상 경험과 관련된 속류 지혜에 속하는 것인가 아니면 어떤 정치적 비유인가. 그것도 아니면 이것은 모종의 형이상학적 메타포인가

   이 아포리즘은 크게 두 가지 층위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이 아포리즘은 친구이라는 대립항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변증법적이다. 둘째, 이 아포리즘은 단지 따옴표 속의 언술을 단순하게 전달하는 게 아니라, 그 언술의 기이한 화자들인 현자‘바보의 대립항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현자죽어가는자이며, ‘바보살아있는자라는 사실이다. 니체는 여기서 후자를 자임하고 있다

   우선 첫 번째 층위와 관련하여 이를 해석해 보자. 첫 번째 따옴표 속의 언술은 현자의 언술이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친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단순한 차원에서 이 주장을 액면 그대로 해석한다면, 이것은 영원한 친구, 절대적인 친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일상 경험에 근거한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현자의 시각이라고 하기에 이러한 해석은 지나치게 속류적이지 않은가. ‘현자의 기원을 그리스적 전통에서 찾는 니체의 문제의식을 상기한다면, 이 대목에서 친구와 우애(우정 philia)에 대해 자세히 얘기한 적이 있는 현자아리스토텔레스가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럽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애의 층위를 크게 세 가지 차원으로 나눈 바 있다. 각각 이익과 즐거움, 탁월성(arete)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 나누는 우애가 그것이다. 이 글의 논의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정치적 우애에 대한 그의 견해이다. 그에 따르면 정치적 우애는 무엇이 정치공동체의 공익(이익)을 구성하며 공익에 봉사하는가에 대한 마음의 일치(homonoia)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즐거움이나 탁월성을 공유하는 사람들 간의 사적인 우애와는 다르다. 공익에 대한 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합의가 전적으로 일치할 수도 없고 불변할 수도 없으므로, 정치적 우애 역시 절대적이거나 영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점에 따라 니체의 이 대목을 해석하면, (그리스적 연원의) 공동체적 이성에 기반하고 있는 현자친구여, (영원한·절대적) 친구라는 것은 없다네라고 주장하는 일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데리다(J.Derrida)가 니체의 이 아포리즘을 핵심적 테제로 설정하고 자세한 분석을 시도하면서, 우애를 이성적 합의를 기반으로 한 정치체 일반에 대한 대안으로 전유하려 한다는 사실이다(데리다, 우애의 정치학). 문제는 이성에 기반한 정치체의 합의 모델을 넘어서려는 데리다의 집요한 탐색에도 불구하고 이미 니코마쿠스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파악했던 것처럼, 이익의 공유를 본질로 하는 정치공동체를 전제로 한 (정치적) 우애의 개념은 여전히 동일성의 논리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데리다의 이러한 시도를 전체성(totality)이라는 차원에서 비판하는 라틴 아메리카의 철학자 엔리케 두셀(E.Dussel)에 따르면, ‘우애의 정치학을 사유하려는 데리다의 관점은 그 자신이 여러 군데에서 날카롭게 비판하는 슈미트(C.Schmitt)와 정작 비슷한 형태의 사고 모델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적이다. 그것은 (정치적) 우애의 존재를 상정하는 사유 모델 자체가, 친구와 적의 구분으로부터 정치를 사유하는 슈미트적 이론 전제를 근본적으로 해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친구와 우애의 반대편에는 적과 적의가 있다. 전자는 후자의 다른 얼굴이다. 따라서 두셀은 데리다가 슈미트의 권력 이론을 일정 부분 인정하게 되는 일이 불가피하다고 비판한다. 여기서 더 깊이 고민해야 할 점은 우애의 정치학조차 넘어서기 어려운 이 대립항의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두셀, 우애에서 연대로).

                                   

 

                                                      니체(F.Nietzsche)

                                                  

     즐거운 시간, 이웃과 바보들의 보편사
   기왕 이야기가 나왔으니 두셀이 이 문제를 어떻게 사유하는지 좀 더 살펴보자. 두셀이 사유의 영감을 찾기 위해 이 대목에서 눈여겨 보는 것은, 예수를 시험하는 랍비의 질문에 대해 이웃을 사랑하라며 예수가 들려 준 착한 사마리아인의 에피소드이다(누가복음 10;25-37). 그가 보기에 이 에피소드는 서사 자체로 많은 것을 함의하고 있는 문학적텍스트다. 우선 이 서사에서 사건은 길 위에서 발생한다. ‘길 위는 율법적 질서, 동일성의 공간에 대한 메타포다. 길 위에서 남자가 강도를 만났을 때, 랍비와 레위 사람이 곁을 지나가지만 그들은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도와주지 않는다. 랍비와 레위 사람은 이스라엘에서 최고의 사회적·정치적 지위를 인정받는 엘리트이고 특권계층이지만 그의 죽음을 방치한다. 그들은 모두 사제나 교사들로서 법과 지식으로 충만한 사원(寺院)으로 가는 중이었다. 그들은 공동체의 권위를 상징하고 그것을 지탱하는 율법의 집행자이자 지식의 담지자인 현자이다. 현자는 폭력적 국가기구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인적 대리인들로서 죽음의 방치자로서 등장한다

   한편 그에 대해 사마리아인은 이 길 바깥에 있는 이방인이다. 그는 유대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비시민권자이고, ‘길 위의 지식을 모르는 ‘바보이다. 길 위의 존재들에게 그들은 길 위에 없다는 점에서 비존재이며, 길 위의 율법적 질서와 지식을 위협한다는 점에서 이교도이자 이다. 무엇보다 그는 지배계급이 업신여기는 하위계급이다. 길 위의 세계에 속하지 않은 사마리아인은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복음 8;23-24)고 말한 예수와 같은 계급이다(목수의 아들로 마굿간에서 태어나 노숙자 신세였던 예수야말로 하위계급의 전형이 아닌가). 그러나 현자의 눈에 예수와 사마리아인은 미친놈’(요한복음 8;48)이고 ‘바보이다(니체 역시 자신의 여러 텍스트에서 스스로를 세상에 대해 미친놈으로 규정한다). 

   예수는 이 사마리아인을 진정한 이웃으로 인정하면서 네 이웃을 하느님처럼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두셀에 따르면 예수의 가르침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는 히브리적 이웃의 개념은 그리스적인 것과 다르다. 그리스적 이웃은 같은 정치공동체에서 태어났으므로 같은 공간에 거주하며 동등한 법적 지위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동일성에 기반한 배타적 시민권을 지닌 개념에 가깝지만, 히브리적 이웃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타인의 고통을 마주하는 순간에 나타나는 윤리적-형이상학적 개념에 더 가깝다. 그런 점에서 이웃길 위의 세계가 포섭하지 못하는 불가능성이자 그 한계가 드러나는 증상이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정치공동체를 구성하는 말과 사물들의 질서-다름 아닌 이데올로기-와 그것의 물리적 현시체인 법률적 지위의 배타성을 넘어선다. 여기에서 친구와 적이라는 대립항은 해소된다. ‘이웃은 적도 친구도, 다시 말해 어떤 대립항도 매개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친구와 적은 아래에서 왔고 나(예수·이웃-필자 주)는 위에서 왔”(요한복음 8;23)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니체의 아포리즘은 형이상학적이면서도 윤리적인 것인 동시에 정치적으로도 래디컬한 메시지를 포함한 것으로 읽힌다. 친구를 부정하는 현자의 언술은 일차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와 키케로를 거쳐 슈미트에게까지 이어지는 정치적 우애에 대한 서구철학사의 전통적 관점을 반영한다. 이때 주목해야 하는 것은 현자를 수식하고 있는 죽어가는이라는 언표다. 동일성·전체성의 지평 위에 서 있는 현자의 지식은 죽음을 구원하지 못한다(‘죽음을 향한지식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친구뿐만이 아니라 적이다. 이것은 단지 친구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적도 없다는 변증법의 불가능성이 자동적으로 도출하는 논리적 귀결이 아니라, 이 애초에 법과 동일성의 바깥, 즉 법과 동일성에 대항하는 적들이자 그것의 타자였기 때문이다. 법과 동일성의 적들은 그 자신이 적이므로 그 스스로는 어떠한 적도 상정하지 않는다(못한다). 그들은 누구도 타자로 규정하지 않는다(못한다). 적이 없는 그들이야말로 자유로운 자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을 전하는 길 위에 사는 이들에게는 "바보이고 미친놈으로 보이겠지만, “야말로 살아있는자다(‘삶을 향한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자다).

   두셀은 법의 효력정지를 명령하는 비상상태(예외상태)를 선포함으로써 오히려 그를 통해 주권적인 법적 질서를 정초·보존하려는 슈미트(C.Shumitt)의 신화적인 법적 폭력에 맞서 벤야민(W.Benjamin)이 사유했던 순수한 폭력이 바로 이것이었다고 본다. 벤야민에게 이 순간은 메시아적인 것이 임하는 지금-시간(Jetzt-zeit)’으로 사유되었다. 그러나 메시아적 시간은 균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의 연속 이후 도래할 미래가 아니다. 그것은 여호수아가 야훼의 힘에 의지하여 지상의 왕들과 싸우며 해와 달을 정지시켰듯이(여호수아 10;10-15), 현존하는 이데올로기적 질서, 지배자들의 율법적 시간이 폭력적으로 정지되는 충만한 절단의 순간이며, 그럼으로써 진정한 비상상태가 선포되는 현재’(‘지금-시간’)이다. 현재가 예언의 대상이 되는 현재, 언젠가 찾아올 미래 시간이 아니라 기억구성을 통해 즉시 회복해야 할 이 지금-시간에만 비로소 보편사가 존재한다. 벤야민은 나는 다가올 시대의 종족을 사랑한다는 휠덜린의 미래를 향한 기도에 맞서, 이 메시아적 시간이 미래에 대한 인류 일반의 기대 지평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억압받는 자들이 억압의 과거를 기억함으로써만이 구성될 수 있고 인식될 수 있는 현재시간이라고 보았다(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폭력비판을 위하여). 신화적인 법적 폭력으로서의 현행 질서란 억압받는 자들을 법의 외부로 몰아냄으로써만 그 자신의 보편성을 주장할 수 있으며, 그런 점에서 이 억압받는 자들의 자리만이 오히려 유일하게 진정으로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이 메시아적 시간에 현자의 지식은 ‘바보’, 다름 아닌 억압받는 계급의 인식·실천에 의해 절단되며, 율법과 동일성의 집행자들로부터 유죄판결을 받았던 공동체 내부의 죄인들은 새로운 친구가 된다. 두셀에 따르면 이 새로운 친구가 출현하는 시간이야말로 니체가 기도했던 즐거운 시간이다.
 
                         

 


              2009년 120일 용산재개발 제4구역 남일당 건물에서 있었던 경찰특공대의 
              철거민 시위 진압장면이 시위진압 작전 중 용산철거민대책위원회 소속 
              철거민5명과 경찰1명이 사망하였다
 
 
   예외들, 메시아가 들어오는 좁은 문

   이 즐거운 시간에 해방되는 것이 어디 에리고로 가는 길에 수인(囚人)이 되고 주검이 된 공동체 내부의 이방인들, 역사의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수많은 예수들뿐이겠는가. 상투적 사고와 법과 이데올로기의 십자포화 속에 억압되고 배제되고 감금되었던 그리하여 착란과 오인 속에 있는 말들의 운명이 또한 그러할 것이다. 이 운명의 행로 중 느닷없이 출현하여 순식간에 길 위의 율법적 질서를 정지시키는 게 바로 예외적인 말들이다. 그것은 현존하지 않았던 것, 말 되어지지 않았던 것의 발생이며 바깥의 소환이라는 점에서 길 위에 어떤 초과적인 것을 도입한다. 따라서 이것은 길 위의 한계와 불가능성이 폭로되는 증상적 시간이다. 적과 친구, 적대와 우애, 정상과 비정상, 도덕과 반도덕을 가르는 율법적 질서를 절단하면서 예외들이 출현하는 순간은, ‘현자들에게는 광기가 출몰하고 어리석은 것들이 횡행하는 순간으로 보이기가 십상이다. 뿐만 아니라 예외들은 법과 도덕과 풍속과 전통을 옹호하지도 않지만, 이른바 진보와 계몽의 관점에서도 이해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벤야민은 이 지금-시간이 정치적인 시간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가장 순수한 차원의 문학적인 시간이기도 하다. 그가 축제의 노래, 문자의 사슬을 폭파한 해방된 산문(befreite Prosa)이 나타나는 순간이라고 말한 게 이 시간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메시아는 단지 구원자로서 오는 게 아니라 적그리스도를 극복한 자로서 온다.
   율법에 포박된 이 길 위의 세계야말로 적그리스도 아닌가.
   문학적인 말의 형상으로 임재한 메시아가 들어올 수 있는 좁은 문은 오직 지금-시간에만 열려 있다.
 
                           

 

                          ‘상상력에게 권력을이라고 외치며, 십자가를 들고 경찰의
                          물대포에 맞서고 있는 68혁명 당시 독일의 시위대

 

<웹진 민연> 2012년 5월호 http://rikszine.korea.ac.kr/
* 이 글은 필자의 평론집 < 예외들>(창비 2012)에 붙은 서문을 주제에 맞게 수정보완한 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