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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행성 이야기

<사물의 철학> 생수 - 미래에서 온 타임캡슐

<사물의 철학>  생수 - 미래에서 온 타임캡슐

 

 

 

 

 

어릴 때 읽은 어떤 소설 속 인물이 그랬다. `미래에는 물도 사서 마시게 된대.` 그로부터 수십 년, 미래는 정확하게 실현됐다.

필자도 자주 생수를 사먹는다. 이상한 건 생수를 볼 때마다 단순한 물이 아니라 해독되지 않는 암호를 품은 낯선 사물처럼 생각된다는 거다. 최근에서야 이 기묘한 이물감의 실체가 뭔지 알게 됐다. 한 베이커리 냉장고 앞에서였다. 일반적인 물병이 아니라 미래에서 온 것처럼 길쭉하고 투명한 `캡슐` 모양 용기에 든 생수와 마주친 것이다.

생수(生水)는 말 그대로 `살아 있는 물`이라는 뜻이다. `죽은 물`과 이것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특별한 수원지를 자랑하는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물맛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서울시의 설명에 따르면 건강에 좋다는 미네랄은 서울 수돗물 `아리수`에도 들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물`이 `생수`가 되는 마술은 저 병에서 생기는 건 아닐까. 유체(流體)의 흐름을 투명하게 고정시키는 저 용기 말이다.

생수의 이미지가 근거하는 무의식은 역설적이다. 생수 회사들은 오염되지 않은 `자연`을 강조한다. 수백 m 깊이 `암반수`를 자랑하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생수는 진시황이 찾아오라고 명령했던 불로장생의 `자연수(自然水)` 같다. 그러나 생수를 `자연스럽게` 흐르던 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생수는 까마득한 시간 동안 인간의 시선에 띄지 않았던 `광물` 비슷하니 말이다. 마치 광물처럼 `캔` 물은 즉시 대기와의 접촉이 차단된 채 다시 인공 투명용기에 밀봉된다.

실제로 `신선한 광물성` 함유는 생수 광고의 핵심 중 하나다. 이 대목에서는 원소기호들 속에서 중세 연금술사들이 발견하려던 `순수 액체`가 떠오르기도 한다. `캡슐 생수`는 이런 점에서 생수의 무의식에 근접해 있다. 적절하게도 그 용기의 표면에는 주기율표의 원소기호를 연상케 하는 큰 영문 로고가 심플하게 새겨 있다.

1500m 수심에서 수억 년 전 물을 길어 올린다는 해양심층수도 등장했다. 빙하수건 해양심층수건, 여기에서 가장 놀라운 건 공룡시대에나 존재했던 물질이 `살아서(生)` 지금 우리 몸속에 투입된다는 사실이다. 이건 신화적인 물질이지 자연이 아니다. 수억 년의 시간, 엔트로피를 거슬러 살아 있는 이 물질의 역설은 이것이다. 인간 역사를 초월한 우주적 과거에서 온 물질이, 까마득한 미래에나 실현될까 말까 한 영생불사 생명공학의 실현처럼 보인다는 사실 말이다.

미래의 인류도 생수를 마실까. 그렇다면 어떤 모양의 병으로?

[함돈균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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