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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행성 이야기

<사물의 철학> 블랙박스 - 어둠은 회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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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나 항공기가 미국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착륙하다가 사고를 냈다. 여러 가지 증언과 추측이 이어지고 있지만, 사고 원인 규명의 핵심은 비행기 블랙박스(Black Box)를 해독하는 데 있을 것이다. 미국 연방교통안전위원회는 지난주 이례적으로 블랙박스를 트위터에 전격 공개했다.

그런데 이 사진을 보고서 갸우뚱했던 이들도 적지 않았을 것 같다. 공개된 블랙박스는 `블랙`이 아니라 `오렌지`색이었으니 말이다. 사실 블랙박스는 검은색이 아니다. 비행기 사고 속성상 블랙박스는 수거 용이성을 위해 최대한 눈에 잘 띄는 오렌지색이나 노란색으로 만들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블랙박스에 `블랙`은 왜 붙여진 걸까. 명칭을 해명하는 게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 `진실`의 박스를 `검은색` 이미지로 부르는 언어적 습성에는 어떤 직관이 스며 있다는 점에서 관심이 간다.

블랙박스가 진실의 열쇠가 될 수 있는 까닭은, 이 사물이 인간적 `기억`에 의존하지 않는 `사물 스스로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도 기억의 메커니즘은 왜곡과 생략, 선별의 전략을 채택한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세태는 단지 세상의 속성이 아니라 인간 자체의 허약한 본질이다. 철학자들의 문학교사라고 불리는 보르헤스는 `기억의 천재 푸네스`라는 소설을 쓴 적이 있다.

이 소설의 역설은 모든 걸 다 기억한다는 게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끔찍한 일이기도 하다는 걸 보여주는 거다. 진실의 전모를 알고, 망각 없는 `절대기억`속에 산다는 건 매우 불행한 일일 수도 있다.

블랙박스는 기억하지 않고 `기록`한다. 비행기가 어떤 방향과 높이와 속력으로 움직이고 있었는지 `기계적으로` 말이다. 여기에서도 해독은 필요하지만, 이 기록은 어떤 의도와 감정과 목적을 배제한 무차별적인 사실에 속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소유와 통제 바깥에 있다. 이 무차별성은 아전인수를 좋아하는 인간적 세태에 반해 우연성과 예측 불가능성의 긴장을 동반하며 진실을 담보한다.

진실은 본래 기억과 손이 닿을 수 없는 어두운 곳(블랙)에 있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그것이 있는 곳에, (진짜)내가 있을 것이다`라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겼다. `그것`의 자리는 기억이 왜곡시킬 수 없는 내면의 원초적 기록의 자리다. 그는 이 자리를 진실이 거주하는 장소라고 말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어둠 속의 `그것`은 언젠가는 반드시 회귀한다.

[함돈균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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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