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민행성 이야기

지식공동체의 재구성 - <시민행성> 소개 경향신문 2013.7.15

올들어 지식인 사회의 두드러진 움직임은 협동조합 만들기다. 이미 창립총회를 열어 출범한 곳도 여럿이고, 협동조합이나 법인을 염두에 둔 채 연구공동체로 시작한 모임도 있다. ‘지식공동체의 재구성’이라고 부를 만한 이런 움직임은 지난해 대선 이후 뚜렷한 좌표를 찾지 못하는 진보·좌파 진영의 새로운 지식·인문 운동 성격을 띤다. 이들 공동체는 지식담론 생산의 위기, 대학과 제도의 위기 속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저항기지의 역할을 추구한다. 동시에 대중과의 괴리를 극복하기 위해 소통과 연대를 적극 모색하고 있다.

■ 어떤 공동체가 있나

올해 첫 출발한 지식·인문 협동조합은 ‘급진 민주주의 연구모임 데모스’다. 2008년 1월 성공회대 사회학과 석·박사 과정을 밟던 대학원생이 만든 ‘급진 민주주의 연구모임’이 지난 3월22일 창립총회를 열고 협동조합으로 전환했다.

 

 

 

 

3월 창립한 ‘데모스’ 조합원들의 세미나 모습.

 

 


홍세화 ‘말과 활’ 발행인이 주도한 학습협동조합 ‘사유와 실천의 공동체 가장자리’는 지난 7일 창립총회를 가졌다. 이곳은 ‘참여와 소통을 통해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공존공생의 삶을 나눈다’를 모토로 삼고 있다.

‘연구와 삶의 일치와 공존’을 추구하는 ‘인문학 협동조합’은 최근 4차 준비위원회를 끝냈으며 이달말 발기인 총회를 연다. 30대 초·중반 신진세대가 주축인 이곳은 박사과정생, 박사수료생, 시간강사 80여명에다 전임교수 10여명이 서포터스 역할을 하고 있다.

노나메기재단설립추진위원회는 지난해 12월부터 ‘지식순환협동조합 노나메기 시민대학’을 추진하고 있다. 9월 창립총회를 열 계획이다.

이형대·조성택·함돈균 등 고려대 교수들이 주축이 된 ‘시민행성’은 실천적 인문공동체를 표방한다. 이달부터 공공성과 시민적 덕성에 기반한 인문·사회·예술·종교·시민 강좌를 시작했다.

경제쪽 협동조합도 생겼다. 유종일 KDI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지난달 ‘지식협동조합 좋은나라’를 만들었다. 유 교수는 “공동체를 위한 종합적인 싱크탱크 기능과 다양한 지식 관련 경제사업을 수행할 것”이라고 했다.

협동조합·공동체 만들기의 한편에선 정치 변혁을 도모하는 연구소 창립과 재정비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 10일 창립한 ‘녹색전환연구소’는 녹색당 재건을 위한 싱크탱크다. 이사장을 맡은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은 “연구활동뿐만 아니라 교육 사업과 네트워크·연대 사업도 준비하고 있다”며 “녹색담론을 확산시키고 녹색가치를 뿌리내릴 수 있는 전초기지로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 김수행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회원으로 있는 ‘사회실천연구소’는 올해 목표를 마르크스주의를 종합하고 대중과의 접점을 넓히는 것으로 정했다. 오 교수는 “기존 강좌의 범위를 넓혔고, 9월30일 목표로 계간지 ‘실천’의 재창간을 준비하고 있다”며 “사회주의 종합연구소로 확대 개편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지식공동체의 의의

지식·인문 공동체는 일단 대학의 위기, 인문학의 위기 상황에서 출발했다. ‘인문학협동조합’의 실무 총괄을 맡은 임태훈 성공회대 외래교수는 “현재 학술장은 소수의 정규직과 대다수 잉여로 구성된 장이다. 불안정한 고용 상태에 불안을 느끼면서 논문 편수를 채근당하는 연구자들에게 삶과 공부는 분리된 지 오래”라고 밝혔다. 이런 현실에 분개하고 각성한 이들이 협동조합 출범에 뜻을 모았다는 것이다. 그는 “무한경쟁과 성과주의에 발목잡힌 기존 제도를 비판적으로 상대화할 수 있는 외부를 구축하겠다”며 “출판·예술 노동자를 비롯해 대학 바깥의 다양한 분야와 연대할 것”이라고 말했다.

‘시민행성’은 새로운 인문운동을 추구한다. 함돈균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는 “각자 삶의 자리, 생활 주변을 바꾸는 근본적인 성찰을 해야 하는 시기”라며 “지식공동체의 방향을 위한 최소한의 도덕이 뭔지, 시민적인 가치가 뭔지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강좌에 참여한 사람들과 네트워크를 결성해 실천적 활동도 해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노나메기재단 설립추진위원회 상임대표인 김세균 서울대 명예교수는 ‘노나메기 시민대학’을 두고 “정치뿐만 아니라 한국사회 어느 분야에서든 진보적 변혁의 씨앗이 될 수 있는 새로운 주체를 형성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조희연 교수·유종일 교수·조성택 교수·김세균 교수(왼쪽부터)

 


■ 평가와 제안

새로운 지식·인문 공동체의 활성화는 지식 담론의 위기, 지식·지식인과 대중의 단절과 괴리, 공론·학술장의 부재에 대한 각성에서 비롯됐다. 이강택 전 언론노조 위원장은 “최근 흐름은 그간 진보·좌파 지식인들이 제대로 대안 담론을 만들거나 시민들과 제대로 소통·교류하지 못한 점을 자성하면서 대안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이 전 위원장은 “그러나 지식인들이 협동조합으로 모인다고 공중과의 관계가 자동으로 복원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수요자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더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형식 당인리대안정책발전소 부소장은 “강제적 검열이든 자기 검열이든, 의제화하지 못한 사안에 대해 날선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점에서 새 지식·인문 공동체 활성화는 바람직하다”며 “이런 지식 운동의 흐름이 야성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 부소장은 또 “새로운 공동체를 추구한다면 자생성·자율성·독창성이 필요하고, 협동조합이라면 지식 유통이 사업체 형태를 띠어야 할 텐데 지금은 그런 측면보다 기존 대안 연구공동체의 모습에 가깝다”며 “제도 바깥에서 대학과 경쟁하기는 무리인 만큼 세력이나 크기를 추구하기보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다양한 실험을 시도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노나메기 시민대학’에 참여 중인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무형의 자원인 지식과 교육으로 협동조합을 조직한다는 것은 다른 협동조합에 비해 비현실적인 것으로 보이기 쉽다”며 “협동조합은 결사체이자 사업체이기에 조합원들에게 자발적 참여 동기를 제공할 분명한 혜택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2013.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