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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행성 이야기

<사물의 철학- 함돈균> 포스트모던 노트

 

세계 도시인의 책상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사각형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컴퓨터도 노트도 책도 아니다.

바로 포스트잇(Post-It)이다. 아마 당신의 컴퓨터 모니터 위에, 벽면 여기저기, 책갈피 사이에도 매우 정확하게 절단된 아주 작은 형형색색 사각형이 즐비하게 `붙어` 있을 것이다. 놀라운 것은 이 작은 `사각형 노트`의 위치가 내일은 전혀 다른 곳, 예컨대 사장의 캘린더라든가, 부모님 집의 냉장고 위로 `이동`해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포스트잇의 형상과 출현은 지식과 진리, 문명의 현실과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것은 불변적ㆍ고정적 세계에서 가변적ㆍ유동적 세계로, 중심 있는 세계에서 중심 없는 세계로의 전환을 암시한다.

원래 이 작은 사각형 노트는 스카치테이프로 유명한 미국 3M사의 강력접착제 개발 프로젝트의 `실패작`이었다.

1970년대에 발명되었으나, 1990년대 이후에야 지금처럼 지구상 모든 지역ㆍ계층에 상용화됐다. 전통 세계에서 문자(지식)의 기록은 분명한 저작권자가 있으며, 변형되지 않은 채 영원히 남는다. 예컨대 조선왕조실록은 사관(史官)의 엄격한 고유 권한으로 왕조차 사후 수정할 수 있는 가필의 대상이 아니었다. 공자와 성경의 말씀 역시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불변하는 진리의 형상으로 전승되었다. 냉전 이데올로기 시대에는 마르크스의 저작이 이런 경전의 역할을 대행했다.

반면 포스트잇의 기록은 흔적 없이 지울(뗄) 수 있으며, 기록은 다른 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고, 다른 맥락에서 만들어진 여러 다른 포스트잇들에 의해 덧붙여질 수 있다. 그것은 하나의 노트가 아니라, 서로 다른 맥락과 관점과 시점에 의해 지워지고 수정되며 가필되고 오염된 수십, 수백 개의 작은 노트 뭉치다. 인종으로 보면 잡종이고, 성별로는 트랜스젠더이며, 책으로 치자면 고유한 저자의 죽음이다. 개인이 아니라 다중(多衆)이고, 정주가 아니라 유목이다.  그래서 포스트잇은 가장 `포스트모던`적인 사물이다. 그렇다면 수정이 자유로운 집단지식사전 `위키피디아`도 인터넷 공간에 출현한 포스트잇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2500여 년 전 플라톤은 시공간적 유동성을 지닌 `문자`를 `말`에 비해 `순수한 진리`를 위협할 수 있는 불순한 존재로 보고 비난했다. 하지만 현대 철학자 데리다에 의하면 모든 지식에 있어 오염과 잡종성, 의미의 연기와 불확정성은 `필연적`이다.

[함돈균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매일경제신문 2013.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