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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행성 이야기

<사물의 철학-함돈균> 퍼거슨의 축구공

 

무게 410-450그램, 직경 68-70센티미터의 길이를 가진 작은 구체가 직사각형 공간 안에서 거의 정지되는 시간없이 빠르게 움직인다. 이 사물은 자가동력기가 아니다. 움직이려면 외부로부터의 물리적 충격이 가해져야 하는데, 대체로 그 방식은 사람의 '발'로 구체에 힘을 가하는 것이다. ‘풋볼(foot ball)’ ‘축구(蹴球)’는 이 물리적 동인을 지시하는 직접적 표현이다. 축구공이 어느 방향으로 튈지 알 수 없다고 말하지만, 이 사물의 물리적 운동 방식만큼이나 단순한 것도 별로 없다. 땅으로 굴러다니거나, 땅 위로 튀어 오르거나, 기껏해야 사람의 머리 몇 개 높이 위로 날아오를 뿐이다. 이 동선은 아무리 멀리 가봐야 가로 105미터, 세로 68미터 내외의 직사각형, 시간적으로는 90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아마 이 사물의 기원은 최소 100만년 이상을 잡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호모에렉투스(Homo Erectus 직립원인)가 되어 두 발의 운용이 자유로웠을 때부터 시작되었을 최초의 놀이도구 중 하나였을 테니까. 세계 고대 어느 문헌에서나 발로 ‘둥근 사물’을 차고 노는 놀이가 있다는 기록은 쉽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단지 둥그스레한 사물이 아니라, ‘한 점으로부터 일정한(같은) 거리에 있는 점들의 집합’이라는 ‘원(circle)’의 정의에 가까운 구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흔히들 ‘축구공은 둥글다’고 말하지만, 완벽한 구체를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옛날에는 지푸라기나 돼지창자, 사람의 두개골 등을 이용하던 축구공이, 현대축구에서는 내로라하는 글로벌 스포츠회사들의 기술력 시험장이 되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이런 축구공 만들기가 중요한 까닭은 완벽한 구체일수록 사방으로 굴러나갈 여지가 커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극히 단순한 형태를 지닌 사물과 그 단순한 동선에 최대한의 탄력성과 예측불가능성을 불어넣기 위해 필요한 목표다. 축구공의 구조는 인간사의 조직원리 측면에서도 생각해 볼 점이 없지 않다. 가장 비효율적인 구조가 복잡하고 탄력성 없는 구조이며, 그 반대가 단순하면서도 탄력성 있는 구조라는 사실은 분명하니까.

  이런 구조는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을까. 원의 정의에 가까운 구체라는 기하학적 아이디어를 상기해 보라. 한 점으로부터 ‘같은 거리’에 있는 점들의 집합이란, 곧 중심과의 관계에서 위계(높낮이)가 없는 점들의 모임이다. 사람을 차별 없고 평등한 존재로 배치할 수 있는 조직에서 더욱더 탄력성 있는 불확실성(자유)이 산출될 수 있다는 뜻이다. 

 현대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으로 불릴만한 알렉스퍼거슨이 맨체스터유나이티드 감독직에서 27년 1500경기만에 은퇴했다. 세계 최고의 팀에 최초의 동양인이었던 박지성을 편견없이 영입하여 적극 활용한 그의 조직원리의 핵심도 바로 이것이었다. 내가 보기에 그는 정말 축구공을 잘 이해한 감독이었다.

함돈균 문학평론가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매일경제신문 2013.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