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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행성 이야기

<사물의 철학-함돈균> 내 머릿속에서 동네길이 지워지다니

 

내비게이션(navigation)은 본래 뱃사람들의 항해술을 뜻하는 말이다. 나침반과 지도, 해도(海圖), 별자리의 위치 파악 등이 이 항해술의 필수목록을 구성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항해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네비게이터(navigator), 즉 항해사의 지도 해석 능력이다. 

 지도에 ‘해석’이 필요하다는 말에 주의하자. 해석(interpretation)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실재(real)와 가상(simulation), 원본과 복사본 사이의 ‘차이’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둘 사이에 벌어져 있는 간극을 메우기 위한 기술이 해석이란 말이다. 전통적 항해술에서 당연히 이 간극은 엄청나게 컸다. 인간의 발품과 눈썰미만으로 만들어진 작은 종이그림과 실제 지형 사이의 간극을 생각해 보라.

  내비게이션이란 말은 이제 우리 삶에 필수용어가 되었다. 누구나 매일매일 운전수-항해사가 되니까. 그러나 이 현대적 현상은 이전 뱃사람들의 상황과는 전혀 다르다. 무엇보다 자동차 유리창에 붙어있는 이 작은 직사각형 상자는 엄청나게 정교한 정보력을 가지고 있다. 뉴욕의 마천루 틈새에 겨우 위치한 작은 도넛상점과 사하라 사막을 매주 이동하는 부시맨의 이동거주지, 부산의 꼬불꼬불한 골목길, 이베리아 반도의 낯선 국도 위 과속카메라의 위치와 강변북로에서 실시간 발생하는 교통변화까지를 모두 ‘알고’ 있다니 충격적이지 않은가. 오늘날 지구라는 별에서 진정한 신(神)의 눈을 소유하고 있는 존재는 우주 공간에 떠 있는 24개의 GPS위성(이건 미공군 우주비행대 소유다!)과 수시로 정보를 주고받는 이 상자다.

  이제 불필요하게 된 것은 지도에 대한 운전수-항해사의 ‘해석’ 능력이다. 원본과 복사본 사이의 간극이 완전히 사라졌는데 무슨 해석 능력이 필요하겠는가. 문제는 이제 ‘가상’이 현실을 대체한다는 사실에 있다. 운전대를 잡은 당신은 더 이상 눈앞의 실제 풍경을 살펴보거나, 자신의 머리에 들어 있던 지형에 대한 오랜 기억을 활용하지 않는다. 이 가상의 스크린이 그 자체로 실제 리얼리티가 되었으므로. 항해사는 당신이 아니라, 이 상자 자신이다. 고집쟁이 ‘김부장’이 10년을 매일 지나다니던 출근길을 이 상자의 지시 하나 때문에 꼬불꼬불한 골목길로 돌아가는 줏대 없는 일들이 그래서 수시로 일어난다.

  노래방이 생기면서 순식간에 노랫말을 까먹게 되었던 경험이 떠오른다. 뛰어난 기능의 전자사전을 손 곁에 두기 시작하면서 난 고등학교 시절보다 영어 단어를 더 기억하지 못하게 됐다. 요즘은 머리에서 20년을 지나다니던 출근길 지도가 자꾸 지워지는 증상이 진행 중이다.

[함돈균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 매일경제 2013.5.24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