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민행성 이야기

이원 <에세이 사물사전-이어폰>(한겨레신문)

[에세이 사물 사전] 이원 - 이어폰

 

 

[에세이 사물 사전] 휴지 ⓒ전지은



이어폰, 귀는 열리고 입은 닫히는 순간

여기가 좋다. 안도 밖도 아닌. 두 개인 것이 좋다. 귀가 두 개인 것과는 무관하게. 밖에서 보자면 양쪽 귀를 막는 것이고, 안에서 보자면 어떤 세계가 계속 도착하는 것.

입이 아닌 귀에 관여하는 것이 마음에 든다. 입은 너무 많이 말한다. 누군가를 만났을 때 입을 다물고 있으면, 미소를 짓고 있다 해도 왜 말은 하지 않고 웃고만 있느냐고 한다. 입은 말을 하는 기관이기도 하지만 침묵의 기관이기도 한데 말이다. 누군가의 말이 들리기 시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입을 닫는다. 세계는, 입은 닫히고 귀가 열릴 때 시작되는 곳은 아닐까. 입이 닫히면 귀가 열리고, 귀가 열리면 눈도 열린다. 비로소 들리고 보인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귀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귀는 웅크리고 있는 토끼 같기도 하다. 책을 읽다가도 와 닿는 문장이 나타나면 귀가 간지럽다. 토끼가 마음껏 뛰는 풀밭이 펼쳐지는 것 같다. 언젠가 귀를 확대한 미술 작품을 보았을 때 웅크린 태아 같았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세상이 궁금한 태아가 얼굴 양옆에 붙어 있다면. 사실은 세상을 잘 모르는데 문득문득 안다고 착각할 때마다 그 귀를 내게 붙이고는 한다. 귀는 연하고 비릿해야 제맛. ‘잘 듣겠다’보다는 ‘연하게 열어두겠다’의 방향.

 

이어폰은 귀의 안도 아닌, 귀의 밖도 아닌 곳에 위치한다. 그것이 마음에 든다. 인간 심리와 닮았다는 생각도 자주 든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세상에 적극적으로 들어가 있으면 벗어나고 싶고 세상과 멀어진다고 생각되면 세상이 곧 암전될 것 같은, 아니 나만 암전될 것 같은 불안에 시달리는. 그것이 위로가 된다.

 

인간에게 이어폰은 유희적 연장이다. 스마트폰 덕분에 이어폰을 더 적극적으로 쓰는 추세다. 헤드폰도 있지만 편의성 때문에 이어폰을 더 많이 쓴다. 물론 휴대가 더 간편해서이기도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몸에서 자연스럽게 뻗어 나가는 줄기 같은 이어폰이 더 이물감이 없다. 이어폰으로 듣는 소리는 모두 다르다. 뉴스가, 스포츠 중계가, 영어가, 음악이 나오기도 할 것이다. 나는 주로 음악을 듣는데 가끔은 아무것도 듣지 않은 채로 이어폰을 끼고 있을 때도 있다. 세상이 잠시 더 선명해지는 느낌. 그때는 비로소 침묵의 말이 들릴 때.

 

내가 지금까지 가졌던 이어폰은 몇 개나 될까. 블루투스 이어폰을 써보기도 했지만 지금 쓰는 것은 b 브랜드의 것이다. 이어폰 코너에 갈 때마다 놀라게 되는 것은 완강하고 강박적인 한 모양에서 어떻게 그토록 여러 가지 다른 느낌을 계속 만들어내느냐는 것. 이어폰에서 진화하는 귀를 보고는 한다. 단지 기술적인 측면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외출을 할 때 최종적으로 내가 확인하는 것은 지갑이 아니라 이어폰이다. 실제 사용 여부와 상관없이 이어폰을 가지고 나오지 않은 날은 괜히 불안하다. 마치 귀를 두고 나온 것처럼. 처음에는 생생하게 들린다는 것 때문에 이어폰을 좋아했던 것 같다. 내가 직접 고를 수 있구나, 나만의 소리가 생겨나기도 하는구나, 두근거렸다. 그리고 최근에 알게 된 것은 이어폰을 끼는 순간, 침묵이 찾아온다는 것. 이어폰으로 음악이 들려오는 순간, 귀는 열리고 입은 닫힌다. 음악은 귓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지만 정확히는 귀의 안도 밖도 아닌, 그래서 안이라고도 밖이라고도 보이는 한 구멍에서 나타났다 사라진다. 끊임없이.

 

존 버거의 어떤 글을 읽다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그대로 이어폰을 끼고 세 시간이 지났다. 나는 침묵하고 있는가. 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귀가 필요하다. 한동안 음악을 듣고 있으니 내 안에서 침묵의 말들이 생겨난다. 입술로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말이 아니다. 침묵의 말. 세상이 완전한 암흑이 되지 않게 하는 힘. 인간이 이어폰을 만들게 된 것은 보다 잘 듣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잘 듣는다는 게 무엇인가를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소리를 듣기 위해서 만들어진 이어폰은 귀를 닫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열리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한겨레신문 2013.8.7> 





이원(시인)



이원

1992년〈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 《불가능한 종이의 역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