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일이 많았던 지난겨울, 겨우 찬바람에 봄햇살이 섞여 들어오기 시작할 즈음 돌연히 `백팩(backpack)`을 하나 샀다. 그날 이후 양복을 입고서도 양어깨에 백팩을 메고 출근한다.
백팩은 가방인가? 물론 패션 피플들은 이런 질문조차 상투적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들에게 그건 단순한 가방이 아니라 `패션`이므로. 그러나 필자에게는 백팩이 단순한 가방도 패션도 아니라면? 사실 백팩을 `가방`이라고 한다면 이것만큼 익숙하고 흔한 것도 없다. 모두들 유치원,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에 들어가서까지 이런 가방을 메고 다니지 않는가.
그러나 그건 백팩이 아니다. 그냥 `책가방`이다. 책가방이라고 하면 으레 등에 메는 가방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기능적인 이유 때문이다. 신체가 충분히 튼튼하게 발달하지 못한 어린이들에게 뒤로 메는 가방은 양어깨로 책 무게를 분산시킨다. 고등학생이 되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이때부터는 `짐` 무게가 급격히 늘어난다. 이제 가방은 `배낭`이 된다. 그런 점에서 텐트까지 짊어진 히말라야 원정대의 저 무거운 배낭 역시 백팩은 아닌 셈이다.
뒤로 메는 가방을 가방이 아니라 `백팩`으로 만드는 비밀은, 실은 백팩 자체가 아니라 그걸 멘 사람의 전체적 의상스타일에 있다. 백팩의 결정적인 코디스타일은 양복이거나 여성정장이다. 나이가 많고, 게다가 사회적 지위까지 높다면 금상첨화다. 백팩의 본질은 (어른)사회의 관습적 시선과 규정적인 통념에서 일탈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어 한쪽 어깨에 멨던 서류가방이나 손에 들었던 핸드백을 `(어린)학생들처럼` 다시 뒤로 멨을 때 발산되는 엔도르핀, 무언가를 등에 멨는데도 오히려 몸이 가벼워지는 무중력감은 다 이와 관련이 있다.
이 일탈의 본질은 `아이`의 에너지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50대 후반인 대기업 CEO나 정년퇴임을 앞둔 교수가 단정한 슈트에 백팩을 메고 20ㆍ30대 직원과 학생들이 앉아 있는 회의실 또는 강의실로 들어오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그 순간 직원들과 학생들은 오히려 자기가 지금 메고 있는 게 백팩이 아니라 실은 `가방`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함돈균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 매일경제 & mk.co.kr, 2013.5.31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시민행성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장집의 한국민주주의론> 소명출판(2013) 김정한, 진태원 기획- 경향신문 보도 (0) | 2013.06.10 |
---|---|
<사물의 철학-함돈균> 신이 모습을 드러낸다면 (0) | 2013.06.10 |
<사물의 철학-함돈균> 내 머릿속에서 동네길이 지워지다니 (0) | 2013.06.10 |
<사물의 철학-함돈균> 퍼거슨의 축구공 (0) | 2013.06.10 |
<사물의 철학-함돈균> 욕망이 옷이 된다면 (0) | 2013.06.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