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민행성 이야기

불붙은 <최장집의 한국민주주의론> 논쟁 - 한겨레신문

문화

최장집의 길에 묻는 최장집 이후의 지평

등록 : 한겨레신문  2013.06.09 20:43 수정 : 2013.06.10 15:22 

 

최장집 교수

‘최장집의 한국민주주의론’

최장집 교수가 그리는 ‘노동 있는 민주주의’는 어떤 모습인가? 그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론의 의미와 한계는 무엇인가?
다시 불붙은 ‘최장집 논쟁’은 묻는다. 당신이 꿈꾸는 진보, 노동, 민주주의는 어떤 모습이냐고.

<최장집의 한국민주주의론>은 김정한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인문한국(HK) 연구교수(정치학), 박영균 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 에이치케이교수(정치학) 등 진보·좌파적 지향을 가진 10명의 소장학자가 원로 정치학자인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의 이론을 분석한 논문 10편을 모은 책이다. 2011년 11월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주최로 열렸던 ‘최장집의 한국민주주의론’ 심포지엄이 바탕이 됐다. 편집을 맡은 김정한 교수는 “이제 최장집이라는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한국 민주주의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며 “그의 민주주의론을 진보적 입장에서 본격적인 학술토론의 대상으로 삼아보자는 취지에서 책을 기획했다”고 말했다. 논문들은 모두 지난달 22일 최 교수가 안철수 의원(무소속)의 캠프로 결합하기 전에 쓰였는데, 책의 출간은 이후에 이뤄졌다.

노동과 진보 강조하지만
자본주의·자유주의 틀서
못 벗어나는 한계 보인다

정당제·대의제 넘어서
직접민주주의 문제의식을
수용할 필요가 있다

최 교수는 1980년대 노동운동 연구, 권위주의 연구 등을 거쳐 1990년 이후 본격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그의 이론은 2000년대 들어서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민주주의의 민주화> 등의 저작을 통해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지게 된다.

그에게 바람직한 민주주의 체제는 분명한 사회적 기반을 가진 여러 정당이 자신이 대표하는 계층의 이해와 요구를 반영하는 이념과 정책을 가지고 경쟁하는 구도다. 우리나라는 ‘87년 민주화운동’ 등을 거치며 선거, 정당간 정권교체 등 절차적 의미에서 ‘민주화’는 성공했지만, 냉전 반공주의의 유산 탓에 보수정당들만의 체제로 귀결됐다는 점에서 ‘민주주의’는 실패했다는 것이 그의 핵심 논리다. 정당은 ‘정치계급의 살롱’이 됐고, 정치는 기득이익의 안정적 유지만을 보장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이런 구도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서민, 노동자계급과 같은 소외계층의 이익을 대표하는 ‘진보정당’이 생겨나 기존 정당들과 경쟁을 해야 한다.

그는 또한 제대로 된 ‘정당정치’ 실현을 위해 비례대표제의 확대, 결선투표제의 도입, 대통령과 여당의 긴밀한 협조체제 등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런 주장의 연장선상에서, 참여정부 시절 열린우리당에서 시작돼 현재 민주당까지 이어지고 있는 ‘정치개혁’ 기조, 곧 지구당 폐지, 중앙당 축소, 국민경선제 도입, 원내정당화, 당정분리 등 미국식 정당제도를 모델로 하는 각종 조처들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이런 그의 주장은 열렬한 지지도 받았지만, 보수·진보 양쪽 진영 모두에서 비판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 책의 첫번째 논문인 김용복 경남대 교수(정치외교학)의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과 정당정치’는 기존 제도정치학계에서 제기된 최 교수에 대한 비판들을 정리한 것이다. 그 비판들 중 하나는 그의 주장이 지나치게 ‘유럽 중심주의적’이어서 한국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20세기 유럽에서 형성됐던 대중·이념정당 체제를 모델로 삼고 있지만, “주변부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중정당에 의해 노동-자본 균열구조가 대표되는 강한 정당체제가 등장한 사례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는 비판이다. 세계화, 정보화, ‘계급의 파편화’ 등 과거와는 다른 정치적·사회경제적 환경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원내정당론’을 주창한 쪽에서는 “대통령제, 유권자들의 교육수준, 민주국가들의 일반적 추세 등을 고려하면 원내정당으로의 개혁이 바람직하고 현실적”이라고 최 교수를 반박한다.

9일 안철수 무소속 의원(왼쪽)의 싱크탱크인 ‘정책네트워크 내일’의 개소식에서 안 의원과 최장집 이사장이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나머지 필자들은 대체로 마르크스주의, 급진적 민주주의 등의 입장에서 최 교수 이론에 접근한다. 이들은 최 교수 이론의 학문적 의의, 국내 현실에서 가지는 진보적 의의에는 일정 부분 동의하면서도, 최 교수의 보수적 한계를 밝히려 한다.

최 교수의 자유주의적 한계에 대한 지적이 대표적이다. 김정한 교수(‘최장집의 민주화 기획 비판’)는 최 교수의 이념적 좌표와 관련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병행발전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큰 틀에서 보자면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와 ‘제3의 길’ 사이 어딘가에 위치할 수 있는 체제를 지향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최장집의 강력한 민주주의 비판에 누락되어 있는 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며 “노동의 경제적 시민권 획득,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존중과 민주적 규제, 재벌 중심 경제구조의 다원화, 여기까지가 아마 최장집의 민주화 기획이 도달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의 최대치일 것”이라고 말한다. 이광일 한신대 강사(정치학)는 ‘최장집의 노동운동(정치) 연구와 담론에 대한 비평’에서 “최장집이 희구하는 것은 서구의 자유주의적(다원주의적) 전통에 있는 자본주의 국가의 그 어떤 형태”라며 “그는 노동운동에 대해 연민과 두려움이라는 ‘중산층의 양가적 반응’을 보여왔다”고 주장한다.

최 교수가 민주주의를 ‘정당민주주의’로 한정함으로써 대의제 외의 다른 형태의 민주주의 가능성, 정당 바깥의 사회운동의 가치를 경시하고 있다는 비판도 주요하게 제기됐다. 박영균 교수(‘민주화 이후의 민주화론에 대한 맑스주의적 비판’)는 “‘대의제’를 넘어 ‘자기통치’라는 민주주의의 ‘이상’을 근원적 토양으로 하여 직접민주주의, 급진민주주의의 문제의식을 수용할 필요가 있다”며 “대의제적 한계에 포박될 경우 엘리트주의적 민주주의로 후퇴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최 교수가 자신의 ‘민주화 기획’을 실현하기 위한 정치적 주체 형성의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도 많았는데, 최 교수는 안 의원과의 결합으로 일단은 이 비판에 대답을 한 셈이 됐다.

이 책의 논문들은 최장집의 민주주의론 분석에만 머물지는 않는다. 이들이 ‘최장집 논쟁’을 통해 제기하고 싶은 문제들은 좀더 근본적인 것들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민주주의’인가? ‘노동 있는 민주주의’는 어떤 방향을 향해야 하는가? 우리 시대 ‘진보’는 무엇인가? “진정한 대표성과 평등을 확보하기 위해 선거 대신 추첨제, 즉 제비뽑기로 국회의원들을 선발해야 한다”(이지문, ‘추첨제 관점에서 본 최장집의 제도민주주의론 비판’) 등 이들의 다양한 대답을 읽다보면 그동안 우리의 정치적 상상력이 ‘보수적 경쟁’의 나선구조에 빠져 있었다는 반성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안선희 기자 shan@hani.co.kr, 사진 후마니타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