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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행성 이야기

<사물의 철학-함돈균> 신이 모습을 드러낸다면 늘 우리 곁에 있으나, 우리가 이 사물의 존재를 비로소 인식하게 되는 것은 어둠이 찾아온 다음이다. 어둠과 반대 속성인 빛을 품고 있지만 어둠에서만 나타나는 빛이라는 역설을 동반한다. 바로 가로등이다. 가로등이 특별하게 여겨지는 때도 그 속성과 관련이 있다. 인적이 끊긴 어둠 속 섬뜩한 골목길, 방향을 제대로 알 수 없는 낯선 지역을 어둠에 갇혀 운전하고 있을 때를 떠올려 보라. 그제야 우리는 이 작은 빛이 친구이자 보호자이자 먼 바다를 건너는 항해사의 등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어둠 속에서 드러나는 이 빛의 양은 많지 않다. 사방을 덮고 있는 밤의 공간적 넓이와 시간적 깊이, 즉 어둠의 총량에 비해 가로등 빛이란 극히 미미하다. 가로등의 역설은 여기에 있다. 빛은 그 실낱같은 희망의 가능성으로 오히.. 더보기
<사물의 철학-함돈균> 아이로 돌아가려는 가방 우울한 일이 많았던 지난겨울, 겨우 찬바람에 봄햇살이 섞여 들어오기 시작할 즈음 돌연히 `백팩(backpack)`을 하나 샀다. 그날 이후 양복을 입고서도 양어깨에 백팩을 메고 출근한다. 백팩은 가방인가? 물론 패션 피플들은 이런 질문조차 상투적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들에게 그건 단순한 가방이 아니라 `패션`이므로. 그러나 필자에게는 백팩이 단순한 가방도 패션도 아니라면? 사실 백팩을 `가방`이라고 한다면 이것만큼 익숙하고 흔한 것도 없다. 모두들 유치원,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에 들어가서까지 이런 가방을 메고 다니지 않는가. 그러나 그건 백팩이 아니다. 그냥 `책가방`이다. 책가방이라고 하면 으레 등에 메는 가방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기능적인 이유 때문이다. 신체가 충분히 튼튼하게 발달하지 못한 어린이들.. 더보기
<사물의 철학-함돈균> 내 머릿속에서 동네길이 지워지다니 내비게이션(navigation)은 본래 뱃사람들의 항해술을 뜻하는 말이다. 나침반과 지도, 해도(海圖), 별자리의 위치 파악 등이 이 항해술의 필수목록을 구성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항해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네비게이터(navigator), 즉 항해사의 지도 해석 능력이다. 지도에 ‘해석’이 필요하다는 말에 주의하자. 해석(interpretation)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실재(real)와 가상(simulation), 원본과 복사본 사이의 ‘차이’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둘 사이에 벌어져 있는 간극을 메우기 위한 기술이 해석이란 말이다. 전통적 항해술에서 당연히 이 간극은 엄청나게 컸다. 인간의 발품과 눈썰미만으로 만들어진 작은 종이그림과 실제 지형 사이의 간극을 생각해 보라. 내비게이션이란 말은 이제.. 더보기
<사물의 철학-함돈균> 퍼거슨의 축구공 무게 410-450그램, 직경 68-70센티미터의 길이를 가진 작은 구체가 직사각형 공간 안에서 거의 정지되는 시간없이 빠르게 움직인다. 이 사물은 자가동력기가 아니다. 움직이려면 외부로부터의 물리적 충격이 가해져야 하는데, 대체로 그 방식은 사람의 '발'로 구체에 힘을 가하는 것이다. ‘풋볼(foot ball)’ ‘축구(蹴球)’는 이 물리적 동인을 지시하는 직접적 표현이다. 축구공이 어느 방향으로 튈지 알 수 없다고 말하지만, 이 사물의 물리적 운동 방식만큼이나 단순한 것도 별로 없다. 땅으로 굴러다니거나, 땅 위로 튀어 오르거나, 기껏해야 사람의 머리 몇 개 높이 위로 날아오를 뿐이다. 이 동선은 아무리 멀리 가봐야 가로 105미터, 세로 68미터 내외의 직사각형, 시간적으로는 90분의 한계를 벗어나.. 더보기
<사물의 철학-함돈균> 욕망이 옷이 된다면 최근 개봉한 블록버스터 영화 `아이언맨3` 여주인공(귀네스 팰트로)이 시사회 때 입은 복장이 화제다. 그녀는 어깨선 아래로 등과 허리와 엉덩이 일부, 허벅지와 다리까지 훤히 비치는 드레스를 입었다. 속옷은 물론이고, 때로는 은밀한 속살까지 투명하게 다 보인다고 하여 일명 누디룩(noody look)으로도 불리고, `시선이 관통한다`고 해서 `시스루(see-through)`라고도 불린다. 시스루라는 이름에 걸맞은 옷이 되려면 애초에 속이 잘 비치는 `섬세한` 옷감을 사용해야 한다. 마치 옷이 두께를 가지고 있지 않은 듯 매우 얇게 재단돼야 한다. 특이한 건 이 옷이 몸매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스키니`와 비슷하지만, 속살에 찰싹 달라붙지는 않는다는 점에서는 그와 정반대 스타일이라는 점이다. 시스루.. 더보기
<사물의 철학- 함돈균> 포스트모던 노트 세계 도시인의 책상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사각형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컴퓨터도 노트도 책도 아니다. 바로 포스트잇(Post-It)이다. 아마 당신의 컴퓨터 모니터 위에, 벽면 여기저기, 책갈피 사이에도 매우 정확하게 절단된 아주 작은 형형색색 사각형이 즐비하게 `붙어` 있을 것이다. 놀라운 것은 이 작은 `사각형 노트`의 위치가 내일은 전혀 다른 곳, 예컨대 사장의 캘린더라든가, 부모님 집의 냉장고 위로 `이동`해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포스트잇의 형상과 출현은 지식과 진리, 문명의 현실과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것은 불변적ㆍ고정적 세계에서 가변적ㆍ유동적 세계로, 중심 있는 세계에서 중심 없는 세계로의 전환을 암시한다. 원래 이 작은 사각형 노트는 스카치테이프로 유명한 미국 3M사의.. 더보기
<사물의 철학> 자전거의 바퀴살은 왜 비어 있을까 꽃샘추위가 반짝 기승을 부렸지만 봄을 기다리는 마음까지 막을 수는 없다. 도시의 낯빛은 새로운 계절의 바람 냄새와 햇살을 느끼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자전거들로 인해서도 화려하게 변한다. 거리를 달리는 자전거를 볼 때마다 인간이 만든 가장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 기하학의 기술적 구현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전체를 이루는 뼈대와 타이어와 톱니 체인이 맞물려 생기는 움직임은 점과 직선과 삼각형과 원이 협력하여 만드는 기하학의 율동이다.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리와 삼각형에 대한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보이지 않는 그 추상적인 원리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저 사물의 경쾌한 운동을 지속시키는 원동력임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의 기반이며, 점은 선의, 선은.. 더보기
<사물의 철학-함돈균> 누가 가장 잘 숨었을까 세 여자가 있다. 온몸과 머리와 얼굴까지 옷가지로 두른 채 오직 눈만 밖으로 내놓은 서아시아 지역 한 여자. 체코의 한 고성에서 열린 가면무도회에서 춤추고 있는 마스크를 쓴 여자. 비키니에 샤넬 선글라스를 끼고 일광욕을 즐기는 마이애미 해변의 한 백인 여자도 있다. 이 셋 중에 가장 자신을 잘 숨기고 있는 여자는 누구일까. 모든 `자기 은폐`의 본질은 이를 `행동의 자유` 문제와 관련하여 이해할 때 잘 드러날 수 있다. 자기를 잘 숨길수록(숨을수록) 그 자신은 행동의 자유가 커질 것이다. 예컨대 도깨비감투나 투명인간 같은 자기 은폐에 대한 이야기는 규율과 금기를 넘어서려는 인간 행동(자유)의 심리학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는 첫 번째 여자가 가장 자신을 못 숨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더보기